파고 또 파도 보물은 쏟아지네
  • 베이징· 정주영 통신원 ()
  • 승인 2005.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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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은허’ 유적 새 갱 7곳 공개…100년 만에 청동검도 처음 출토

 
수천 년을 지하 깊은 곳에서 잠자던 중국 은허 유적지의 또 한 부분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번 발굴에서는 전쟁용 마차가 말과 함께 묻힌 갱(坑) 7개가 발견되었는데, 규모와 수량 면에서 뿐만 아니라 마차 갱에서 양날이 있는 청동 단검까지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은허에서 청동 단검이 나온 것은 이곳에 대한 유적 발굴이 시작된 지 거의 100년 만에 처음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부연구원 리우총푸(劉忠伏)는 또 이번에 발굴한 마차가 3천3백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며, 이번 발견은 상(商)나라 시대 수레의 형태와 용도, 사용 제도 등을 연구하는 데 중대 의의를 갖는다고 밝혔다. 

20세기 현대 고고학이 서방으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이후, 중국에서는 수많은 고고학 성과들이 있었는데, 특히 은허의 발견과 발굴은 첫 손가락에 꼽힌다. 중국 고대 유물은 곧 ‘은허 유물’로 통할 정도다.

은허는 중국 고대 상나라 시대 말기(AD 1300년 ~1046년)의 도읍으로, 3백 년간 상나라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기원전 1046년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의 마지막 제왕인 주왕을 물리치고 상나라를 멸망시킴에 따라 이곳은 폐허로 변했고, 이로부터 ‘은허’라는 이름을 얻었다. 은나라는 상나라의 다른 이름이다.

전쟁 마차, 상나라 연구에 큰 도움

중국 중부 허난(河南)성 안양(安陽)현의 24만㎡에 위치한 은허는 1928년 근대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된 이후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고대 유물을 토해내고 있다. 여기에는 갑골문과 청동기를 포함한 대량의 문화재들이 포함되는데, 그 중 갑골문 발견은 세계 고고학사에서 큰 획을 그은 대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뿐 아니다. 지난 80여 년 동안 고고학자들은 은허에서 궁전,종묘 건축군 유적 50여 개와 왕릉으로 보이는 큰 묘 12개, 귀족,평민 묘지 수천 개, 제사 갱  1천개, 수공업 공장 5개, 마차갱 30여 개, 그리고 많은 청동기와 옥기·도자기·골기들을 발견했다. 이에 은허 유적지는 메소포타미나 및 이집트 신전과 더불어 고대 문화의 보고로 인식되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

중국의 전통 고고학은 송(宋) 시대의 금석학(金石學)이었다. 당시 금석학은 주로 청동 예기(?器)나 석각(石刻)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고도의 과학적 발굴 기술을 요하는 근대적 고고학은 청 말기까지 그다지 학문으로서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신(新)중국 건립 이전에도 10여 명의 고고학자와 10여 곳의 발굴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중국 성립 이후 중국 고고학의 발전은, 가장 최근 것만 살펴보아도 가히 눈이 부시다.

2004년, 허베이성 문물연구소, 저장성 문물고고학연구소, 중국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산시성 고고학연구실, 베이징 대학 고고학 학원 등 고고학 관련 기관들은 합동으로 2004년의 중국 고고학 발굴 성과를 대표하는 ‘7대 발견’을 발표했다. 

이 중 첫 번째는 허베이 지역의 고대 선민(先民)들, 즉 선사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이현(易縣) 북복지(北福地) 유적으로, 신석기 시대 재구덩이,집터,제사터 등을 찾아냈다. 다음으로는 장교분(庄橋墳) 양저(良渚) 문화 유적과 묘지 유적이 꼽혔는데, 이 중 무덤군은 지금까지 발견한 양저 문화 시기 무덤군 중 최대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가 발벗고 고대사 ‘증거’ 수집

세 번째 발견은 허난 알리터우(二里斗) 유적이다. 알리터우 유적은 중국에서 첫째 가는 도읍 유적으로 꼽히는데, 중국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지에서 수레바퀴 흔적 2개를 발견했으며, 이를 통해 두 바퀴 수레 사용 연대를 좀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외에도 중국 고고학은 산시성 서한(西漢) 시대에 축조된 식량 비축 창고, 당나라 시안(西安) 대명궁(大明宮)의 연못인 태액지(太液池) 유적, 명,청 시대 중국 최고,최대의 도자기 가마터인 경덕진(景德鎭)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벌였다.

최근의 성과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식물 고고학 연구 분야에서의 새로운 진척이다. 이는 지금부터 8천년 전과 9천년 전 사회, 경제 발전 단계와 농업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제공했다. 허난성 무양(舞陽) 가호(賈湖) 유적은 채집,어업,수렵 경제가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경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랜 역사와 문명 강국으로서의 전통은 중국에 풍부한 매장 문화재를 남겼다. 하지만 중국 고고학 발굴 작업에서 정작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다. 고고학을 단순히 ‘과거 재현’ 또는 ‘보물 찾기’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로 파악해 고고학적 발굴에 국가 차원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고고학 발굴 열기는 이런 점에서 이웃  나라인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욱이 한국과 중국은 고구려사 등 논란과 다툼의 소지가 많은 고대사를 공유하고 있다. 더욱이 고대사 이전의 실상은 증언이 있을 수 없고, 시대를 거슬러올라갈수록 문자 기록이 줄어들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 성과, 즉 ‘증거’의 위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중국인은 까마득한 과거를 파들어 가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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