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질서 ‘계보’ 찾기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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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천하국가>/‘역사공동체’ 개념 본격 전개

 
지난해 초 고구려사 문제로 시끄러울 때다. ‘고구려를 중국에 빼앗길 수 없다’며 사회 전체를 달뜨게 하던 주장들과는 좀 다른 목소리를 찾다가 서강대 사학과 김한규 교수(55)를 만났다. 그는 마침 <요동사>(문학과지성사)라는 책을 출간하려던 참이었다.

그 책에서 그는 요동, 즉 지금의 만주 지역 역사를 중국사나 한국사에서 떼어내 독립된 역사로 서술했다. 이를 위해 그가 고안한 것이 국가나 민족과 다른 ‘역사 공동체’라는 개념이었다. 요동 지역은 중국이나 한국과는 다른 생활 방식과 지역적 전통을 공유한 별도의 역사공동체였고, 고조선·고구려·발해뿐 아니라 요·금·원(몽골)·청이 요동 역사공동체에서 발원한 나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시도는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중국의 주장과 ‘고구려는 한민족의 나라’라는 한국의 주장 모두를 뒤엎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한국이나 중국과 별개의 국가였다”(<시사저널> 제745호)는 그의 주장이 소개된 뒤 소동이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김한규 교수는 독특한 학자다. 그의 전공은 중국 고대사이지만, 그의 관심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중국 고대에서 출발한 그의 연구 주제는 지난 30년 동안 공간과 시간 양면에서 조금씩 확장되어 왔다. <고대 중국적 세계질서 연구>(1982년) <고대 동아시아 막부 체제 연구>(1997년) <한중관계사>(1999년) <티베트와 중국>(2000년)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2003년) <요동사>(2004년) 등에서 그의 관심사가 엿보인다.

그가 다시 책을 썼다. <천하국가>(소나무). 870쪽짜리 두툼한 이 책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전통 시대 동아시아의 세계 질서를 다룬다. 아울러 역사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중국과 변강의 관계를 추적해온 김한규 역사학이 중간 결산하는 의미도 갖고 있다.

이번에는 중국 학계가 불편해 할 듯

<천하국가>에서 김교수는 중국(사)를 철저히 해체해야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역사뿐 아니라 전통 시대 동아시아 역사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관심은 요동과 티베트를 넘어, ‘초원유목 역사공동체’ ‘서역 역사공동체’ ‘강저(羌?) 역사공동체’ ‘만월(蠻越) 역사공동체’ ‘대만 역사공동체’ 등으로 확장된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 역사공동체뿐 아니라 수많은 변강 역사공동체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각각의 역사 공동체는 고유한 지역·문화·역사적 전통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체한 후 살펴보면, 중국(역사공동체)은 황하 이남 양쯔강 이북의 이른바 중원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번 책은, 국내 국사학계를 공분시켰던 지난해 책과 달리, 중국 역사학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듯하다.

책 제목으로 쓴 ‘천하국가’는 한 단어가 아니다. ‘천하, 국, 가’로 읽어야 맞다. 춘추전국시대 천자와 제후, 대부는 각각 천하와 국, 가를 통치했고, 이들은 책봉과 조공을 주고받으며 서로 관계를 맺었다. 김교수가 전통 시대 동아시아의 시계 질서를 탐구하는 책 제목을 이렇게 붙인 데는 까닭이 있다. 지난 3천년 동안 동아시아사는, 약간씩 변형이 있기는 했지만, ‘중심국’(중국이 아닌)을 정점으로 한 책봉과 조공 관계가 관철되던 역사였다는 것이다.

 
중심국은 대부분 중국이었지만, 10~11세기 이후부터는 요·금·원·청 등 요동 역사공동체에서 발원한 통합 국가가 여러 차례 중심국 지위를 차지했다(이들 국가는 김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당연히’ 중국이 아니다). 김교수는 또한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도 고구려가 책봉-조공 관계라는 중국적 세계 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관을 갖기 시작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역사공동체론을 바탕으로 하는 김한규 역사학은 역사 이론이 별로 없는 국내 역사학계 실정에서 볼 때 독보적이다. 물론 반론도 많다. 많은 국사학자들은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요동 지역은 사실상 중국과 융합되었으며, 역사공동체 개념은 결국 고구려를 중국에 넘겨주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김교수는 이에 대해 “역사적 사실의 복원은 반드시 그 시점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따져야 하며, 현재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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