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안된 그림 선택 “희한하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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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원권 새 지폐에 넣을 ‘초충도’ 둘러싸고 논란 구구

 
초충도(草蟲圖)가 화제다. 한국은행이 지난 9일, 위조 지폐를 방지하기 위해 내년 상반기에 발행할 예정인 5000원권 새 지폐의 뒷면에 이 그림을 넣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화폐에 그림이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초충도는 나비·메뚜기·개구리 등을 주로 가을의 풀과 어울리게 그린 것으로 병풍으로 만들어 안방을 장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한국은행이 새 지폐에 넣으려는 초충도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1504-1551)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행의 발표 이후 고미술업계에서는 초충도와 관련한 논란이 일고 있다. 신사임당이 그린 것이라고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국가의 공식 화폐에 넣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한 고미술 전문가는 “혹시라도 나중에 진품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국가적인 망신을 살 수 있다.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인가”라고 우려했다.

국내에 초충도는 많다. 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국립춘천박물관 등 박물관 외에 개인이 갖고 있는 것도 많아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 않을 정도다. 인사동 고미술 업
 
계에도 여러 점이 흘러 다닌다. 문제는 신사임당이 초충도를 워낙 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초충도가 신사임당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확인된 초충도는 단 한 점도 없다.

5000원권 새 지폐에 들어갈 예정인 초충도는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 8폭 병풍인데, 수박과 여치, 맨드라미와 개구리가 그려진 두 폭 그림이 들어갈 예정이다. 신사임당의 그림이라고 전해지는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민화에서 수박은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을, 맨드라미는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번 그림 선택에서 이런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 초충도는 원래 율곡 이이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던 송담서원에 보관되어 온 작품이다. 1804년 이 서원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서원에 있던 박기수라는 이가 들고 나와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이의 막내 동생 이우의 15대 종손인 이장희씨가 우연히 이 그림을 발견해 박기수씨의 4대손인 박영균씨로부터 사들였다.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오죽헌을 성역화하면서 ‘율곡기념관’을 만들자 이장희씨가 이 그림을 기증한 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다.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의 초충도 8폭 병풍에는 발문이 2개 붙어 있어서 전체 10폭이다. 시와 글에 능한 문인 정 호가 1715년, 노산 이은상이 1965년 발문을 썼다. 정 호는 ‘이 초충도는 신사임당의 작품이라고 전해 내려온다’는 내용을, 이은상은 초충도가 전해져 온 내력을 기록했다. 이 초충도에는 낙관이 없다.

“차라리 율곡 <격몽요결> 넣어라”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도 이 그림이 진품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박물관은 지난해 10월11~11월13일 신사임당 탄신 500주년을 기념해 ‘아름다운 여성 신사임당’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을 연 적이 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서울대학교박물관이 참가해 신사임당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20여점이 공개되었다.
 
당시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은 소장품을 포함해 이들 작품 모두에 대해 ‘전(傳)신사임당’이라고 발표했다.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질 뿐 진품임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항교 박물관장은 전시도록에 ‘개별 작품들의 화법이 동일하지 않은 데다가 수준도 일정하지 않아 모두 진품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위작이라고 간주할 수도 없다’고 썼다.

한국은행이 누가 그렸는지가 확실한 수많은 국보 회화들을 제쳐놓고 이 그림을 화폐에 넣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은행 관계자는 “지폐 앞면에 나와 있는 인물과 관련 있는 내용을 뒷면에 넣고 있다. 신사임당은 5000권 지폐의 앞면에 있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고, 초충도는 신사임당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초충도 가운데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되는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품을 골랐고, 8폭 그림 가운데 화폐의 디자인을 고려했을 때 잘 어울리는 2폭 그림을 골랐
 
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공인된 것이 아니어서 문제 삼을 수는 있겠지만 (초충도를 쓰기로 결정한 것은)불가피했다”라고 말했다.

한국은행은 새 지폐 발행을 앞두고 외부 교수 5명을 포함해 10명으로 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초충도를 넣기로 한 부분에 대해 자문에 응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자문위원들의 면면은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내부적으로는 공식 보도자료 외에 이와 관련한 언급을 하지 않기로 한 상태다.

일부 전문가들은 새 지폐에 보물 602호인 <이이수필격몽요결(李珥手筆擊蒙要訣)>을 넣었으면 논란이 없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고 있다. 이 책은 율곡 이이가 42세 때인 선조 10년(1577) 관직을 떠나 황해도 해주에 있을 때 글을 배우는 어린이의 교재로 쓰기 위해 쓴 것이다. 현재 강릉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문화재는 율곡이 직접 쓴 친필 원본이다. 1976년 4월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 관계자는 “대안이 될 수는 있다.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책이기 때문에 화폐 뒷면에 넣기에는 이상하다. 장단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문화재위원장인 서울대 안휘준 교수는 “초충도 가운데 확신을 갖고 신사임당의 작품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진품은 없다. 문제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회화 전문가인 안교수는 “지폐에 그림이 들어가면 국민들이 그림을 좀더 가까이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라며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한 고미술 전문가는 “화폐 발행과 관련해 논란이 이는 것은 어떤 경우든 바람직스럽지 않다. 이번 기회에 최소한 화폐에 들어갈 예정인 초충도가 신사임당의 작품인지를  분명히 가릴 필요가 있다. 그것이 어렵다면 다른 대안을 찾는 것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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