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끈 캐나다판 ‘살인의 추억’
  • 김상현 ()
  • 승인 2005.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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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살해 27건 저지른 희대의 살인마 검거…시체는 돼지 사료 둔갑

 
2002년 2월, 캐나다 벤쿠버 경찰은 시 외곽 포트 코키틀람 지역의 돼지농장 주인 로버트 윌리엄 픽튼을 1급 살인 협의로 체포했다. 이후 18개월에 걸친 대대적인 조사 끝에 픽튼은 15명의 실종 여성들에 대한 살인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로부터 3년여가 흐른 지난 5월 말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고등법원의 공판에서, 픽튼의 살인 혐의 건수는 12건이 추가된 총 27건으로 늘어났다. 캐나다 범죄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 사건이 천천히, 그 무시무시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픽튼 사건’이라고 이름 붙은 연쇄 살인극의 시작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83년 6월22일, 당시 23세의 매춘부 레베카 구노가 밴쿠버 시내 동쪽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 자취를 감추었다. 대개 사춘기에 가출해 마약에 중독되고, 약값을 벌기 위해 거리로 나선 이 지역 매춘부들은 이름을 바꾸거나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 다반사여서, 사흘 뒤 신고가 들어온 그녀의 실종은 별반 수사 당국의 눈길을 끌지 못한 채 경찰서 서류더미 속에서 잊혀졌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미항이자, 이민자들에게는 선망의 도시인 밴쿠버. 그러나 이 도시 한켠에는 캐나다 최극빈 동네가 자리잡고 있다. 시내 동쪽의 10블록 남짓한 구역 안에는 다 쓰러져가는 값싼 호텔과 전당포 건물이 늘어서 있고, 거리에는 쓰레기와 쓰고 남은 피임 기구, 주사 바늘이 넘쳐난다. 마약 중독자들과 매춘부들, 그리고 조직 폭력배들이 모여드는 이곳은 북미 지역에서 에이즈 감염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도 악명이 높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레베카를 비롯해 매춘 여성들이 실종하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다. 두 번째 희생자는 1984년 1월 이후 모습을 감춘 매춘 여성 셰리 레일이었다. 40대 초반이었던 그녀의 경우는 심지어 3년이 지나서야 실종 신고가 접수되었다. 이후 1986년 일레인 아우얼바흐를 시작으로, 다수의 여성들이 차례로 실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밴쿠버 동부의 실종 여성은 63명

1992년 6월 케이틀린 웨이틀리(실종 당시 39세)이 행방불명된 후, 밴쿠버 다운타운 동쪽에서 일어나던 의문의 실종 사건은 3년 여 가량 중단되는 듯했다. 그러나 1995년 3월 또 한명의 매춘 여성 실종자가 나타나면서, 실종 행진은 재개되었다. 1997년 8월은 가장 끔찍한 달로 기록됐다. 한 달 사이 3명의 여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1년 이상 이 사건들을 모른 채 지나갔다. 10명의 매춘부들이 더 증발한 뒤인 1989년 9월, 비로소 실종 여성들에 대한 경찰의 공식 조사가 시작되었다.

한 원주민 그룹이 다운타운 동쪽에서 살해된 것으로 의심되는 희생자들의 명단을 경찰에 건네면서 철저한 조사를 요구해왔다. 처음 당국은 이 명단을 검토한 뒤, 그 내용에 허점이 많다고 발표했다. ‘살해당한 희생자’라고 명기된 이름 가운데에는 질병이나 마약 남용으로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다른 이들은 밴쿠버를 떠났거나 생존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 데이브 딕슨 경사는 원주민들의 불평에 주목해 독자 탐문 수사에 착수했다. 실종자들의 실종 패턴을 분석한 결과, 1995년 이래 다운타운 동쪽에서 행방이 묘연한 16명의 매춘부로 수사 범위를 좁힐 수 있게 되었다.

미제 사건과 범죄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인 이른바 ‘지리적 신상 명세(Geographic Profiling)'의 창안자이며, 매춘부들의 잇단 실종이 연쇄 살인범의 소행이라고 판단한 킴 로소모 경사도 일련의 실종 사건에서 이상한 낌새를 찾아냈다. 그러나 경찰 상층부는 대중이 공포에 질릴까 우려해 연쇄 살인범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이 수사 인력은 85명으로 증강되었고, 실종 여성의 가족,친지로부터 신상 정보와, DNA 분석 자료에 대한 수집 작업이 계속되었다. 이 사이에 또 4명의 매춘부가 실종되었다.

1998년말 빌 히스콕스라는 제보자로부터 경찰은 흥미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아내를 여의고 마약과 술어 절어 살던 히스콕스는 의붓 누나의 도움으로 ‘써리’라는 지역의 한 식당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히스콕스는 이들이 벤쿠버 외곽의 포트 코키틀람 지역에 갖고 있던 돼지 농장으로 월급을 받으러 다니곤 했다. 그런데 히스콕스는 신문에  보도된 매춘 여성 실종 기사를 읽은 뒤, 이 농장의 주인 픽튼 형제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들 형제가, 농장 건물을 개조한 ‘돼지 궁전’에서 매번 얼굴이 바뀌는 매춘부들을 데려다가 흥청망청 술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픽튼 형제의 이름은 경찰에도 낯설지 않았다. 동생인 데이빗은 1992년 성 폭행죄로 벌금을 물고 가석방된 전력이 있었고, 세 차례 상해죄로 고소되기도 했다. 형인 로버트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그는 1997년 3월 마약 중독자인 한 매춘 여성을 살해하려 했던 혐의를 받았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히스콕스는 픽튼을 ‘범인’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경찰에 “창녀들이 돌아가고 나면, 픽튼의 농장과 트레일러에 지갑이나 신분증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픽튼은 차창을 짙게 선팅한 개조된 버스를 끌고 늘상 매춘부를 찾아 다녔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후 픽튼을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농장까지 수색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던 2000년 2월7일, 밴쿠버 경찰은 실종 여성 특별 조사반이 포트 코키틀람의 픽튼네 농장과 인근 건물에 대한 수색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불법 총기 소지죄로 구류중이던 픽튼은 가석방되었다가, 같은해 2월22일 두 건의 1급 살인죄로 재입건되었다. 2001년 7월 발생한 두 건의 실종 사건에 픽튼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나긴 연쇄 살인 사건은 마침내 꼬리가 잡힌 것이다.

수사받으면서 유유히 살인 계속해 ‘충격’

희생자 주변인들은 놀라는 한편 격분했다. 두 여성 모두 돼지 농장이 요주의 대상으로 떠오른 뒤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농장 수색에서 왜 아무런 성과가 없었는지, 픽튼이 경찰 감시를 피해 어떻게 살인 행각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 시원한 대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 20년간 밴쿠버 다운타운 동쪽 지역에서 실종된 여성 수는 현재까지 모두 63명을 헤아린다. 그 가운데 픽튼의 돼지 농장에서 DNA가 수거된 희생자 여성들은 31명이다. 선정 보도로 유명한 미국의 폭스 뉴스는 ‘경찰은 팔다 남은 냉동고, 나무 절단기 등에서 인체 일부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희생자들의 시체가 돼지 사료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캐나다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극으로 꼽힐 ‘픽튼 사건’은 그러나 아직도 전모가 소상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경찰은 픽튼의 돼지 농장에서 찾아낸 결과를 바탕으로, 또 다른 지역에까지 수사 영역을 확대했다. 이 수사에는 52명의 인류학자와, 2명의 토양 전문가들까지 동원된 상태다.

픽튼 사건 공판은 내년 초 재개되어, 최소한 8개월 이상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캐나다인들은 캐나다판 ‘살인의 추억’을 곱씹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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