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한국, 무대 위에서 퍼덕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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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도시 연작 13번째 작품 <러프 컷>

 
“차라리 나를 인터뷰하세요. 나를. 피나 바우쉬 선생은 제발 그냥 쉬게 해주세요.” 안무가 피나 바우쉬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다가간 기자를 막아선 사람은 다름아닌 LG그룹 구본무 회장이었다. 구회장은 피나 바우쉬를 보호하기 위해 인터뷰를 자청하며 흑기사로 나섰다. 이날 피나 바우쉬는 LG아트센터로부터 제작비 10억여원을 후원 받아 제작한 <러프 컷>의 전세계 초연을 마치고 리셉션을 갖고 있었다.

<러프 컷>은 LG아트센터 개관 5주년 페스티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올려졌다. 피나 바우쉬는 1986년 로마를 배경으로 한 <빅토르>를 시작으로 국가·도시 연작 시리즈를 제작해왔다. 한국을 소재로 한 <러프 컷>은 연작 시리즈의 열세 번째 작품으로 LG아트센터가 발주해 제작되었다. 지난해 11월, 그녀는 무용단을 이끌고 2주 동안 방한해 한국의 이미지를 채집해 갔다.

피나 바우쉬의 국가·도시 연작 시리즈는 세계 무용계에서 많은 눈길을 끌었지만 모든 작품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국을 소재로 한 <오직 그대>(1996년)나 홍콩아트페스티벌과 공동 제작한 <유리 청소부>(1997년), 포르투갈 리스본 세계박람회와 공동 제작한 <마주르카 포고>(1998년)은 혹평을 듣기도 했다. 한국을 소재로 한 <러프 컷>은 어땠을까? 과연 LG아트센터는 피나 바우쉬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에게 이용당한 것일까?

한국 배경으로 한 피나 바우쉬의 국가/도시 연작 시리즈 열세 번째 작품

지난 6월21일, <러프 컷> 공연이 LG아트센터에서 있었다. 이미 독일 부퍼탈에서 공연된 적이 있었지만 시연이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초연이었다. 그런데 객석에 들어선 관객들은 다소 실망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무대에는 덩그러니 하얀 절벽과 바위 하나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피나 바우쉬는 연극이나 여타 무대에서 한 번도 선보이지 못한 다채로운 무대 미술을 보여주어 환호를 받아왔다. 그런데 너무나 단출한 무대에 관객들은 의아해 했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자, 실망은 금세 환호로 바뀌었다. 절벽과 바위를 배경으로 여백의 미를 구현해 내면서도 다채롭게 활용했다. 특히 2막이 시작되면서 객석에서는 ‘역시’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흰 절벽을 거대한 스크린으로 활용했다. 절벽에 거친 파도와 잔잔한 물결, 아늑한 들판의 모습을 비추어 다양한 느낌을 전달했다. 한국에서 수집해간 다양한 음원을 믹싱해 만든 음악과 스크린의 영상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련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피나 바우쉬는 관객들이 무대에서 화려함이 아니라 새로움을, 규모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미적 충격을 받기 원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 불 흙 공기 등 자연계의 4대 원소를 무대에 활용했던 그녀는 흙이 물로 바뀌는 모습을 통해 한국의 역동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관객은 어떤 다른 무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동안 피나 바우쉬는 관객을 현대무용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무가 역할을 해왔다.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그의 작품은 현대무용이 구현하려는 바를 명확히 제시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그녀는 무당이 되었다. 그녀는 관객에게 무용수를 살아 있는 제물로 바쳤다. 무용수를 극단적인 상황에 빠뜨려놓고 그 안에서 격정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든 것이다. 가학자의 위치에서 불편한 심정으로 작품을 보며 관객 역시 격정에 빠져들곤 했다.

한국인의 일상언어를 무용언어로 재해석

 
격정적인 작품 속에서 한 가닥 해학으로 탈출구를 열어주곤 했던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해학에 방점을 두었다. 격정이 줄고 해학이 는 것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했다. 만년의 피나 바우쉬가 인생을 관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나타나게 된 현상으로 바라보는 옹호론도 있었지만,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가 빚어낸 역사의 아우라를 담아내지 못하고 한국을 표피적으로 관찰했기 때문이라는 비판론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국의 일상적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포착해 무용 언어로 풀어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한국을 나타내기 위해 등목을 하는 장면과 김장을 담그는 장면을 무용으로 표현했는데, 특히 김장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여러 무용수가 한 무용수를 배추로 묻는 장면과 무용수들이 배추 부채를 부치는 장면을 통해서 그녀는 일상적 장면에서 판타지적인 모습을 끌어냈다. 

피나 바우쉬가 한국의 이미지를 채집하기 위해 머무른 시간은 2주였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 기간에 한국을 최대한 파악하기 위해 그녀는 LG아트센터에 세 가지를 요구했다. △인터뷰 일정을 최소화하여 한국 체험에 집중할 수 있게 할 것 △박물관이나 관광지가 아닌 실제 한국인들의 삶의 현장을 직접 보개 해줄 것 △보고 느낀 것을 소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줄 것.

남도의 굿판에서 미아리 사창가와 결혼식장까지 누비며 그녀는 부지런히 한국의 이미지를 긁어모았다. 2주라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어떤 나라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은 결코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예술가 특유의 감수성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재해석했다. ‘빨리빨리 증후군’에 걸려 있는 한국인의 바쁜 움직임 속에서 그녀는 ‘부드러움과 강함, 전통과 현재의 공존’을 읽어냈다.

피나 바우쉬 안무의 지향점은 합일이다. 그녀는 인생과 무용을, 무용수와 관객을, 무대와 무대 밖 세상을 일치시키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런 그녀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일상의 몸짓을 무용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일상 언어를 무용 언어로 바꾸는 코드는 반복이다. 그녀는 팔짱을 끼었다가 다시 푸는 장면, 턱에 팔을 괴는 장면 등을 반복해 재생시킴으로써 무용으로 승화시켰다.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던 한국의 강렬한 장면들이 무용으로 표현되었다. 그녀는 머리채를 휘어잡는 장면과 붕어빵을 뒤집는 장면 등을 반복시킴으로써 우리의 일상을 무용화했다. 가장 압권은 반가사유상을 응용한 무용이었다. 바쁘게 뛰어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선 무용수가 반가사유상의 포즈를 반복해 취함으로써 역동성과 고요함을 동시에 표현해냈다. 꼭두각시놀음과 살풀이, 탈춤의 춤사위 등 우리 고유의 움직임도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피나 바우쉬가 파악한 한국의 이미지는 '부드러움과 강함, 전통과 현대의 공존'

확실히 LG아트센터는 헛돈을 쓴 것이 아니었다. 피나 바우쉬는 <러프 컷>에서 단순히 한국의 이미지를 무대에 재현해 내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의 안무적 역량을 투입했다. 피나 바우쉬 안무의 특징은 무리보다 개인에 무게 중심을 둔다는 것이다. 개별 무용수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소주제를 표현해 내느냐로 작품의 완성도를 가늠할 수 있다.  

무용수 한두 명이 풀어내는 개별 에피소드들은 모두 완성도가 있었다. 심지어 무용수들은 무리 지어 무대를 뛰어다닐 때에도 서로 다른 표정으로 서로 다른 감정을 표현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피나 바우쉬의 섬세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특히 남녀 무용수들이 바닥에 누워서 부둥켜안고 서로 다른 춤을 추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러프 컷>은 두 번의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 피나 바우쉬의 무용 세계를 그 어느 팬들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부퍼탈의 팬들이 환호했고, 작품의 당사자인 한국 팬들이 성원했다. 이제 전세계 팬들과 만날 차례다. 피나 바우쉬의 춤사위에 담긴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정신이 전세계 팬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지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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