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석유에 ‘빨대’ 꽂는 중국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5.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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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기업 앞세워 석유회사 유노칼 인수 추진…미국 의회 “넘겨주면 큰일”

 
미국에 때 아닌 아시아발 ‘황색 경보’가 몰아치고 있다. 알 카에다의 테러 위협 때문이 아니다. 진원지는 미국이 21세기 최대의 잠재 경쟁국이자 위협국으로 간주하고 있는 중국이다. 중국 정부가 지분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한 석유 회사가 파격적인 가격을 제시하며 미국내 굴지의 석유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기업간 자유로운 인수,합병이야 자본주의 선도국인 미국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다름 아닌 중국의 기업이 미국 기업, 그것도 전략 업종인 석유 회사를 인수하려 들자 미국 조야가 전례 없이 떠들썩하다. 이미 공화·민주 양당 의원 41명이 부시 행정부에 대해 이번 인수 건에 제동을 걸어줄 것을 요청한 상태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느끼는 중국발 쇼크는 과거 1980년대 소니 같은 굴지의 일본 기업들이 록펠러센터와 유니버설 스튜디오 등 미국의 대표적 부동산과 영화 업체를 매입할 당시를 능가하는 것 같다. 

현재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는 문제의 중국 석유회사는 중국 정부가 70%의 지분을 갖고 있는 시누크(CNOOC,중국해양총석유공사).  시누크 사는 최근 미국내 9대 석유사인 유노칼(Unocal)을 주당 67 달러로 쳐서 총185억 달러에 매입하겠다는 인수 제의를 공식화했다. 지난 1890년에 설립된 유노칼 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석유 회사로 주요 활동 무대는 태국·인도네시아·필리핀 등 아시아 지역이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말 총수입액은 82억 달러. 그만큼 탄탄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누크로부터 인수 제의를 받기 앞서, 이 회사는 미국의 오일 메이저 가운데 하나인 세브론 사로부터 166억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이미 동의한 상태다. 최종 계약서에 서명만 안 했을 뿐, 이미 세브론 사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만일 유노칼이 세브론과의 약속을 깨고 시누크와 손잡을 경우 5억 달러의 위약금을 물어야 하지만, 시누크로 팔려갈 경우, 그래도 남는 장사가 되는 셈이다.

사태의 핵심은 유노칼 인수 건이 단순히 세브론과 시누크 두 기업만의 인수,합병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시누크 사의 인수 제의를 계기로 미국 조야에서 한동안 수그러들었던 이른바 ‘중국 위협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이같은 맥락에서 이번 문제는 고도의 정치 사안으로 변질했다.

‘중국 위협론’ 다시 고개 들어

미국은 이번 일이 터지기 전에도 중국이 과거 달러화 강세 시절, 위안화 가치를 달러화에 고정시켜 대미 수출에서 엄청난 이득을 챙겨온 데 대해 잔뜩 불만을 가져온 터였다. 그 뒤 미국은 중국 정부에 대해 위안화 평가 절상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중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올해 초 출범한 부시 행정부 2기는 로브 포트먼 무역대표부 대표를 중심으로 기존의 대중 무역 정책에 대한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또 로버트 젤릭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곧 중국을 방문해 중국 위안화 절상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일 태세다.

미국 의회쪽 분위기는 이보다 더 심각하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환율 저평가 정책을 지속할 경우, 중국산 수입품에 최고 27.5%의 관세를 부과하는 입법안이 7월 중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100%다. 지금도 미국은 매주 중국으로부터 40억 달러의 상품을 수입하고 있다. 지난해 총수입액이 약 2천억 달러에 달했을 정도다. 불과 10년 전 수입액 38억 달러였던 데 비하면 천양지차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이 미국의 불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엄청난 대미 흑자를 내고 있던 상황에서 시누크사 인수 건이 터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시누크의 인수 건이 단일 중국 기업으로는 미국내 최대의 투자 건인 동시에, 기존의 미중 교역 관계에 일대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중국은 지금까지 대미 투자라고 해보았자 미국 재무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사들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덕에 중국이 보유한 미국 채권액은 2천3백억 달러로 일본에 이어 세계 2위 규모에 이른다. 지난 2004년 중국 기업들이 해외에 투자한 금액은 고작 36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정도 투자액도 전년도에 비해 27%나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올해 시누크 사가 단일 기업으로서 무려 185억 달러를, 그것도 미국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선뜻 제시했으니 미국이 경계심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시누크 사의 인수 자금은 실질적 대주주인 중국 정부가 내놓을 것이 뻔하다. 시누크 사뿐 아니다. 지난해에는 중국의 컴퓨터 제조 회사인 레노보 그룹이 미국 IBM 사의 개인 컴퓨터 부문을 17억5천만 달러에 매입했고, 중국의 가전 업체인 하이얼 그룹이 미국의 대표적 가전 업체인 메이태그사를 13억 달러에 매입했다. 다만 레노보나 하이얼 그룹의 경우는, 공략 대상이 에너지 사업이 아니었던 탓에 이번 건처럼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미국 의원들 “자금 출처 등 철저히 심사해야”

미국 조야가 시누크 사의 인수 제의에 이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은 매일 급등세를 보이는 유가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은 그 원인을 국제 원유 공급량은 제한되어 있는데 중국 같은 나라들이 무제한 수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진짜 긴장하는 속내는 다른 데 있다. 이번 인수 건 뒤에 시누크 사 차원을 넘어선 중국 정부의 ‘불순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중국 정부가 자국의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담보하기 위해 전세계 석유 자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국의 국영 기업을 통해 무차별 인수 작전에 나서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그것이다. 즉, 미국의 ‘석유 패권’에 중국이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내다.

중국의 석유 갈증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후진타오 주석은 지난 2002년 중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뒤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남미와 동남 아시아, 아프리카를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올해부터, 미국처럼 석유 위기가 닥쳤을 때 최소 3개월 가량을 버티기 위한 전략 석유 비축 기지를 건설키로 하고, 우선 1단계로 2천5백만 갤런의 석유를 저장할 기지를 건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에 있는 국책 기관인 중국 현대국제관계연구소의 첸펭잉 선임 연구원은 최근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에너지 문제가 미중 관계를 위협할 가장 심각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전세계 주요 석유 자원에 대해 사실상 통제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도 뒤늦게나마 경제와 군사 부문 성장의 원동력인 석유 자원의 확보를 위해 총력전에 나서고 있어 양측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시누크의 움직임을 심상치 않게 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상무부에서 수출입 통제관을 지낸 윌리엄 라인시씨는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회견에서 ‘중국이 단순히 기존의 원유를 구입하는 선을 넘어서 유노칼 사의 인수를 통해 미래의 원유 자원까지 통제하려 한다면, 이는 국가 안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브론 사의 피터 로버트슨 부회장도 ‘이번 인수 건은 지정학적 요인이 개입된 것으로, 시누크 사가 유노칼을 인수하면 원유를 세계 시장에 수출하기보다는 순전히 중국 국내용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미국 조야의 기류는, 시누크 사의 인수 제의 건을 미국 정부 차원에서 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의회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시누크 사의 인수 제의 사실이 공개되기 무섭게 공화,민주 양당 의원 41명이 부시 대통령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외국인 대미 투자심사위원회’(CFIUS)로 하여금 철저히 심사하도록 촉구했다.

이들은 특히 이번 인수 건에 중국 정부가 깊숙이 개입했는지의 여부, 나아가 시누크의 인수 조달 자금이 중국 정부의 보조금인지의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특히 공화당의 리처드 폼보 하원 자원위원회 위원장과 던컨 헌터 하원 군사위원장은 “시누크의 인수 제의는 미국내 일자리와 에너지 생산, 에너지 안보와 관련해 많은 우려를 불러일으킨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허가권 쥔 부시 행정부 ‘난감’
 
워싱턴쪽 기류가 심상치 않자 시누크 사는 ‘설령 유노칼을 인수해도 원유와 가스 생산 분의 상당량을 미국에 되팔겠다’고 공개 천명했다. 특히 시누크측은 유노칼이 보유한 원유와 가스 매장고의 70%가 아시아에 몰려 있다는 사실과, 이 회사의 미국내 석유 보유고는 미국 총소비량의 1%에 불과하다는 점을 홍보하고 있다. 또 미국 정부가 앞으로 ‘외국인 대미투자심사위원회’를 소집할 경우, 이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와는 별도로, 시누크측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지난 2004년 대선 당시 현 부시 대통령의 언론 홍보 책임자를 진낸 마크 매퀴논 씨를 고용했는가 하면, 골드만 삭스와 J.P. 모건 등 미국 굴지의 투자자문사는 물론  애킨 검프 같은 종합 법률회사와 손 잡고 총력 로비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내 전문가들 사이에는 이번 인수 문제를 두고 찬반이 엇갈려 있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지난 6월27일자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중국은 미국의 전략적 맞수이자 빈약한 부존 자원을 둘러싼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1980년대 미국 기업 사냥에 나섰던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다’며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반면 미국 뉴욕에 있는 비영리 기관인 석유산업연구재단의 로런스 골드스타인 의장은 같은 신문과의 회견에서 ‘시누크 사가 항공모함이나 미사일 기술을 구축하려는 것이 아닌 마당에 이번처럼 교역 문제를 꼴사나운 정치 문제로 변질시킬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국 경제의 사령탑격인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도 시누크의 공세에 제동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의원들을 향해 “미국의 대중 교역의 미래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라며 경고했다.

유노칼 인수건은 부시 행정부로서도 크나큰 정치적 골칫거리다. 대중 무역 적자 문제 말고도 북한 핵 문제와 대만 문제 등 민감한 정치적 사안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중국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에서, 이번 인수 건을 무조건 ‘국가 안보’란 이유로 거부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게다가 유노칼 인수 건이 끝내 무산될 경우 중국은 석유 자원을 갖고 있는 아프리카와 남미의 소위 ‘불량 정권’과도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유노칼 인수 문제에 대해 최종 허가권을 쥔 부시 행정부의 고민이 깊어간다.

 
시누크 사의 유노칼사 인수 작업 최대의  변수는 부시 행정부의 개입 여부다. 만일 상무부 산하 ‘외국인 대미투자심사위원회’가 국가 안보상 이유로, 시누크 사의 인수 건에 대해 정식 심사에 착수할 경우, 그 자체만으로 인수 가능성에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이 위원회에는 국무부, 국토안보부, 상무부, 국방부, 법무부, 무역대표부 등 국가 안보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연방 부처의 장관과 백악관 고위 관리 12명이 참여하며, 상무장관이 위원장을 맡는다.

이 위원회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중재역이지만, 관련 법률이 워낙 모호해 ‘국가 안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어떤 인수 건이고 무산시킬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다.
 
이 위원회가 생기게 된 계기는 지난 1980년대 후반 불어닥친 일본 기업들의 미국 투자 열풍이다. 미국내 자산이 모두 일본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에 휩싸인 미국 의회가 서둘러 관련법을 제정함에 따라 탄생한 것이다. 1988년 통과된 법안의 이름은 ‘엑슨-플로리오법’. 이 법에 따라 미국 상무부 산하에 출범한 기관이 바로 ‘외국인 대미투자심사위원회’다.

이 법은 해당 외국 회사가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신뢰할 만한 증거’가 있을 때, 미국 대통령이 인수 건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은 ‘국가 안보’에 대해 구체적인 정의를 내리지 않아, 결과적으로 심사위원회가 안보 목적 부합 여부를 자의적으로 판단하게 되어 있다.
 
이 위원회는 지난 27년간 모두 1천5백60개의 인수 건을 검토했으나 국가 안보를 이유로 공식 심사에 회부한 것은 25건에 불과했다. 일단 공식 심사에 회부되면, 45일 간의 조사가 진행되며, 이를 바탕으로 위원회는 최종적으로 자체 권고안을 담아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지난 1988년 이후 이런 공식 심사 절차를 거쳐 대통령에게 최종 보고된 외국 회사의 미국기업 인수 건은 12건이었지만, 정작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단 한 건에 불과했다.

공교롭게 당시 거부권이 행사된 건도 중국 회사와 관련된 것이다. 지난 1990년 당시 조지 H. 부시 대통령(현 W. 부시 대통령의 부친)이 미국 시애틀에 본부를 둔 항공기 부품회사인 맴코 사의 지분을 인수한 중국의 국영 중국항공기술수출입사에 대해 인수 거부 명령을 내렸다. 당시에도 거부 명령 이유는 ‘미국의 국가 안보를 저해한다’는 것이었다. 또 지난 2003년에는 홍콩에 기반을 둔 중국의 허친슨 왐포아 사가 미국 굴지의 광섬유 제조 회사인 글로벌 크로싱 사를 인수하려다, 이 문제가 ‘외국인 대미투자심사위원회’에 회부되자 인수를 포기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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