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의 발랄한 비틀기
  • 김형석 (<스크린> 기자) ()
  • 승인 2005.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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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좀도둑’ 이순신과 남북한 군인들의 만남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퓨전 사극’(‘퓨젼 사극’도 가능하다)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의외로 많은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제목이 등장한다.  ‘정통 사극’이 내용의 진지함과 철저한 고증을 내세운다면, 퓨전 사극은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삐딱한 느낌의 사극을 일컫는 단어다. 정의가 명확히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마케팅 전략과 저널의 재생산을 통해 어느 정도는 감을 잡을 수 있게 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퓨전 사극으로 꼽힌 작품은 드라마 <다모>다. 이른바 ‘다모폐인’이라는 신드롬을 일으킨 이 드라마는 종래 사극과 달리 과학 수사와 현대적 음악 등을 사극에 접목하고 무협 장르 특유의 액션을 가미하면서도 멜로 드라마의 스토리라인을 놓치지 않는 양수겸장 전략으로 시청자들로부터 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퓨전 사극은 시대극 장르의 관습에 충실하면서도 그 안에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데 묘미가 있는다. 그런 면에서 퓨전 사극은 사극 장르라는 커다란 물줄기에서 파생된 하위 장르라기보다는 기존 장르에 몇몇 새로운 요소를 접합한 하나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퓨전 사극 점점 늘어

<대장금> 같은 드라마도 일종의 퓨전 사극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궁중 사극이 왕을 둘러싼 일파들의 암투를 중심으로 하는 것에 비해 장금이라는 낮은 신분의 여성이 어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 ‘성공시대’를 이야기의 축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음식이라는 소재 또한 이 드라마를 정통 사극의 영역에서 조금은 이탈시킨다. 혹자들은 <해신>이나 <쾌걸 춘향> 같은 드라마도 퓨전 사극에 포함시킨다.

영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퓨전 사극이라고 한다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들 수 있다. 프랑스 작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서간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캔들>은 클래식 풍의 영화 음악을 배경으로 당시 상류층의 삶을 꼼꼼히 고증했다. 요부와 정절녀와 바람둥이라는 삼각구도 또한 종래 한국 영화의 사극 풍속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설정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퓨전 사극이 장르와 스타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낭만자객> 같은 류는 시대착오적 방식을 사용한 퓨전 사극이다. 가장 대표적인 신은 (<줄리아나>를 패러디한 것이 분명한) ‘주리아나(酒利亞羅)’ 주점 장면이다. 조선 시대의 나이트클럽인 이곳은 관능적인 쇼와 힙합 음악이 교차하는, 마치 코슈프레 파티를 연상시키는 장소다. 이 전통을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1993년에 나온 에로 사극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를 만나게 되는데, 강희맹의 <하용물야(何用物也)>를 원작으로 했다는 이 영화에는 조선 시대 아낙네들이 캉캉 춤을 추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러한 ‘두 시대의 만남’은 타임머신이라는 기계를 통해 곧잘 코믹 효과를 내는데, <백 투 더 퓨쳐>에서는 1950년대 사람이 1980년대에서 온 사람에게 속옷 상표를 보고 캘빈 클라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군> 또한 대표적인 ‘시대착오 퓨전 사극’이다. 혜성의 영향으로 4백33년 전으로 돌아간 2005년 사람들은 장군이 되기 전의 이순신을 만나고, 뜻하지 않게 ‘천군(天軍)’으로 추앙받으며 역사에 개입한다.

<천군>은 한국판 <백 투 더 퓨처>

무과 시험에 낙방하고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던 이순신, 미래에서 날아온 남북한 군인들은 그를 도와 장군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는 좀처럼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행히 오랑캐들의 침략 앞에서 그는 서서히 ‘구국의 영웅’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퓨전’한 모습은 21세기 군인과 16세기 오랑캐들이 벌이는 처참한 전투 장면이다. 기관총과 활과 창과 칼이 오가고 육박전과 기마전이 뒤엉키는, ‘퓨전’ 그 자체다.

퓨전 사극을 보다 보면 가끔은 매우 의도적이며 계산적인 시대 착오 장면을 만나기도 하는데, 니카라과를 건국했다고 하는 (사실은 해적에 가까운 미국인) 윌리엄 워커의 이야기를 담은 <불사신 워커>라는 영화에서는, 19세기 초의 이야기 속에 20세기의 아이콘들이 숨쉬고 있다. 워커가 이끄는 병사들은 지포 라이터로 말보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콜라를 마신다.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시사 주간지에 워커의 얼굴이 실리고, 애플 컴퓨터가 등장하는가 하면, 마차 옆으로 벤츠가 달려간다.

이러한 전략은 어떤 효과를 지닐까? 이 영화는 끊임없이 니카라과(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를 침략했던 미국에 대한 악취미에 가까운 조롱이다. 워커는 니카라과 민중에게 “우리는 여러분을 통치할 권한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결코 여러분을 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멘트는 레이건이 했던 말의 반복이다(이 영화는 1987년에 만들어졌다). 각자 다른 시대성과 아이콘과 캐릭터와 장르적 요소를 뒤섞으면서, 그 결과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퓨전 사극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퓨전 사극이라면 항상 명심해야 할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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