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보다 무서운 ‘자연의 복수’
  • 정숙진 뉴캐슬 통신원 ()
  • 승인 2005.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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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기상 이변 속출에 전전긍긍…블레어 총리도 발벗고 나서

 
영국 잉글랜드 지방 남부의 글래스턴베리라는 곳은 세계적인 음악 축전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6~8월 이곳에서 축전이 열릴 때면, 영국 국내에서는 물론 유럽 각지의 음악 애호가들이 구름같이 몰린다.
 
지난 6월24~26일 열린 이번 축전은 좀 달랐다. 개막 전부터 폭우가 세차게 내려 하마터면 행사를 완전히 망칠 뻔했다. 이 때의 폭우로 행사장의 너른 공터에 펼쳐놓은 텐트 수만 개가 물에 잠겼다. 소방차들이 긴급 출동해 3만ℓ가 넘는 물을 퍼내야 했다. 그러나 축전 분위기에 들뜬 관람객들은 악천후에도 아랑곳없이 오히려 물바다가 된 야영지에서 헤엄을 치거나 노를 저으며 엉뚱한 물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이번 폭우의 피해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주변 농지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내년 행사는 이미 취소되었다. 이 날 내린 비에 따른 피해는 글래스턴베리뿐만 아니라 멀리 윔블던에까지 미쳤다.

영국의 기후는 흔히 ‘온화한 해양성 기후’라고 일컫는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기후여서 영국은 극단적인 기상 현상으로 인한 자연 재해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영국의 날씨는 ‘하루에도 사계절이 다 있다’고 할 정도로 변덕이 심하다. 비가 내렸다가 맑아지거나, 바람이 불다가 눈까지 내리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영국인은 날씨 걱정이 자심하다. 최근 영국의 방송들은 앞다투어 기상 이변을 주제로 한 특집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글래스턴베리 물난리 직후 영국 ITV는 ‘이것이 최악의 날씨인가?’라는 제목으로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극단적인 기상 현상인 허리케인, 홍수, 토네이도, 여름의 이상 기후, 이렇게 네 가지 주제를 나흘에 걸쳐 다루었다. 주로 미국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지난 3~4년간 발생한 대재앙에 가까운 기상 이변 양상과 그 피해 현장을 보여주었다.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물난리

이같은 영국 방송의 특집물들이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지난 5년간 있었던 기상 이변이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국은 무재해 지역’이라는 전통적인 사고에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다. 영국의 자연 재해 방지 시스템은, 매년 재해를 입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취약하다. 당연히 영국 국민이 느끼는 위기감 또한 약하다.

영국인들의 위기감은 지난해부터 부쩍 커졌다. 올해 6월 영국 북 요크셔 지방에 밤새 내린 폭우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상당히 큰 피해가 났기 때문이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태풍권에 접어드는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 단기간에 발생한 폭우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직도 이 지역에는 전원과 상수도 등 기본적인 생활 기반 시설이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다. 지난 6월29일에는 옥스퍼드를 비롯해 옥스퍼드셔 일원에 폭풍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물바다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각 지역 화재통제실의 비상 전화가 끊겼다.

 
전통 문화 유산을 간직한 관광지로도 유명한 콘웰 주의 보스카슬 또한 이에 못지 않다. 이 지역이 홍수 피해를 본 것은 지난해 8월. 지난 여름 런던 근교를 비롯한 잉글랜드 전역에 폭우와 돌풍으로 주택과 상가의 피해가 컸다. 또한 올해 1월 웨일스 지역까지 홍수 피해가 줄을 이어, 피해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글래스턴베리에서 물난리가 나면서, 영국 전역이 지난해의 악몽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홍수뿐만 아니라 폭설과 폭염도 심심치 않게 발생해 영국인들에게 기상 이변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인들도 이같은 기상 이변을 무분별한 개발과 산업화 등 인간 활동에 따른 ‘자연의 복수’로 여기고 있다.
 
지난해 자연 재해의 가공할 위력을 소재로 한 영화 <The day after tomorrow>가 전세계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는 비록 ‘가상 현실’을 보여주었지만, 자연의 압도적인 위력 앞에 무력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모습은 영국인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G8 회의에서 기후협약 해결하려 미국 설득

지난해 크리스마스 기간 동남아 지역을 휩쓴 쓰나미의 충격 또한 영국인에게 환경 재앙 위기감을 부추겼다. 당시 재해 지역에 있던 영국인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를 쓰나미에 잃은 영국인에게 환경 대재앙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글래스턴베리 물난리 직후인 지난 7월6일부터 나흘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는 선진 8개국 정상 회의(G8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곧이어 터진 런던 테러 사건의 충격에 뒤덮여 쉽게 잊혔지만, 영국은 이 때 누구보다 열심히 환경 재앙을 막을 대책을 논의하는 데 열심이었다. 아프리카 빈곤 타파와 기후 변동에 따른 대책이 이 회의의 주요 의제로 떠올랐던 데에는, 회의 주최국 영국의 문제 의식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특히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의무적으로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도록 한 ‘교토 의정서’를 지지하는 유럽연합과 이와 반대로 교토 의정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사코 자기 방식대로 가려는 미국의 입장 차를 줄이기 위해 애를 썼다.

그 결과 이번 G8 회의는 미흡한 대로 성과도 거두었다. 지금까지 지구 온난화의 중요한 원인에 대해 ‘인간 활동이 낳은 부작용’이라는 중론을 한사코 부정해왔던 미국측이 마침내 이번 회의에서 인정한 것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또 이번 회의에서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교토 의정서를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계속하는 데에는 동의했다. 그 첫 회의는 오는 11월, G8 회원국과 중국·인도 등 온실 가스 배출량이 많은 일부 개발도상국들을 당사국으로 해 영국 런던에서 열린다.

영국은 지금 테러로 인한 두 가지 복수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하나는 이슬람의 증오가 결부된 자살 폭탄 테러라는 ‘인간의 복수’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복수’다. 두 가지를 혼자 힘으로는 쉽게 극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영국인은 전율을 느끼고 있다.
뉴캐슬·정숙진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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