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 싫어? 너나 잘하세요
  • 이형석(<헤럴드 경제> 기자) ()
  • 승인 2005.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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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박찬욱의 복수 3부작

 
‘찬욱씨’가 전작 <올드보이>에서 유지태의 입을 통해 “복수는 정신 건강에 좋다”라고 했으니, 그의 복수 3부작을 ‘정신적 보양식’으로 여기고, 때가 때(삼복!)이니만큼, 그가 전하고자 하는 세 가지 ‘가르침’을 ‘복수의 삼계탕’ 삼아 섭취해 보자. 그의 신작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의 유희에서 속죄의 철학으로 이동하는, 확실히 정신 건강을 배려한 듯 여겨지는 작품이기도 하니 말이다.

‘제 일계(第一戒), 3의 완전함을 경배하라’. 성경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고, 변증법에는 정반합이 있으니, 박찬욱에게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가 있다. 복수 3부작을 이루는 세 편은 하나의 거대하고 논리적인 체계로 짜여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이 부르주아 송강호와 프롤레타리아 신하균의 운명적이고 계급적인 ‘적대’를 드러내는 정치적이고 구조주의(개인은 시스템의 한 기능에 불과하다는 견해)적인 텍스트라면, <올드보이>는 신화와 상징을 빌린 미학적이고 행동주의(인간의 행위를 자극과 반응으로 해석하는 시각)적인 작품이다. 완결편 <친절한 금자씨>는 자유 의지를 가진 인물이 주어진 조건을 이용해 복수를 성취하며 마지막에는 근심하고 슬퍼하는 서정적이고 도덕적인 영화다. <복수는 나의 것>이 건조하고 차다면, <올드보이>는 습하고 뜨거우며, <친절한 금자씨>는 따뜻하고 서정적이다.

결국 금자는 복수의 피로 ‘죄사함’을 입고, 박찬욱 감독은 복수가 완성되는 그 자리에서 복수의 기나긴 여정을 반성한다. 복수가 복수를 부정하며 속죄와 구원의 형식으로 바뀌면서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 3부작이 빚어내는 역설의 종합판으로 떠오른다.

감옥에서 출소한 금자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차가운 말 한마디와 함께 전도사가 내민 두부를 땅에 내팽개침으로써 신의 손길을 거부한다. 예수가 죽기 전 자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과 나누듯, 금자는 복수를 다 이룬 마지막 순간에 조력자들과 복수를 자축하는 핏빛 케이크를 나눈다. 그 길에서 돌아와 홀로 선 금자는 그가 거부했던 두부로 만든 케이크에 이제는 스스로 얼굴을 파묻는다. 복수 또한 금자의 길이 아니었으니 ‘헛되고 슬프도다’. 인간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복수가 아닌 속죄였으니.

매너 좋은 박찬욱의 불량스런 악취미

‘제 이계, 여성을 공경하라’. 안 그러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생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박감독의 작품 중 유일하게 2남1녀 설정을 회피한 이 작품은 여성 주인공 금자를 내세움으로써 역설적으로 복수 3부작 전체를 송강호(<복수는 나의 것>) 최민식(<올드보이>) 이영애로 이루어지는 2남1녀 공식으로 완결한다.

여성이 주인공일 뿐 아니라 복수 3부작 중 유일하게 혈육의 원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도 <친절한 금자씨>만이 갖는 특징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누이를 잃은 농아 청년(신하균)이나 납치범에게 딸을 잃은 아버지(송강호), <올드보이>에서 누이를 잃은 사내(유지태)나 영문 모르게 15년 동안 감금당한 또 다른 사내(최민식)에게 복수는 운명이었고 필연이었으며, 신이 예정한 길이었다. 반면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갈등하고 선택하며, 신이 내린 잔을 거부할 권리를 얻는다. 이것은 <올드보이>에서 강혜정을 끝내 진실로부터 소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박찬욱 감독이 여성을 위해 남겨둔 ‘최후의 결정적 배려’이자, 마지막 편에 와서야 회복한 ‘젠더적 도덕률’이다.

‘제 삼계, 찬욱씨가 싫다고? 너나 잘하세요’. 금자 역을 맡은 이영애는 시종 냉소와 서정, 천사성과 악마성을 오가며 관객에게 도덕적인 판단을 요구한다. 금자는 후반부에서 복수의 대상(최민식)을 묶어놓은 뒤, 복수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칼을 내민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자유와 책임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돌아온다. 이것이야말로 최근 한국 영화에서 가장 흥미진진하며, 복수 3부작을 전체를 꿰뚫는, ‘매너 좋은 찬욱씨의 불량스런 악취미’다.

<친절한 금자씨> 시사회 후 평은 예상대로 엇갈리고 있다. 지지자는 ‘복수의 악무한적 유희를 끊고 속죄의 서정과 구원의 철학으로 비상한 박찬욱의 유머러스하고 논리적인 종결’에 박수를 보내고 있고, 반대자는 ‘복수에서 속죄로의 뜬금없는 비약과, 여전히 뒤틀린 박찬욱의 냉소와 위악을 비난한다. 신을 거부한 자기 속죄와 구원의 방식은 기독교인들의 반감을 살 만하다. 여성 주인공을 통해 3부작을 완결지었건만 여전히 ‘남성적 시선’이라는 혐의를 거두지 않는 비평도 있다.

어쨌거나, 오만함이 녹아있는, 반감을 살 만한 어투이지만, 그래서 더욱 ‘찬욱씨의 악취미’가 더 싫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금자씨가 하고픈 딱 한마디. “너나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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