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고취 잇는 아스라한 손길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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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도공 이용희·윤재진 씨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여계산 기슭. 전날까지 쏟아 붓던 장마가 그친 여름 하늘은 딱 비색(翡色) 그 자체였다. 하늘만이 아니었다. 눈길을 돌려보니 첩첩이 펼쳐진 먼 산의 색깔 또한 농도만 조금씩 다를 뿐 역시 비색이다. 천년 전 고려청자를 빚던 도공들이 쳐다보던 색이 바로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년 전 이곳에 고려청자 관요(官窯)가 있었다. 지금은 강진군 고려청자사업소가 자리하고 있다.

기자가 청자사업소를 찾은 이유는 청자 빚는 과정을 보고 싶기도 했지만, 도공 이용희씨(67)와 제자 윤재진씨(54)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취재차 들른 강진군청 관계자로부터 ‘이실장’(그는 이곳의 연구개발실장을 맡고 있다)이 7월 말 열리는 강진 청자문화재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윤씨는 그의 후임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 땅에서 청자의 맥은 고려 말 이후 수백 년간 끊겨 있었다. 간간이 청자를 구워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박물관에 가서나 볼 수 있던 그 청자들과는 색의 격부터 달랐다. 그러던 중 1978년 고려청자의 색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이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이용희씨였다. 이씨는 이후 30년 가까이 고려청자 재현에 매달렸다.  

윤재진씨의 안내로 물레 위에서 도자기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는 성형실과 상감 무늬 따위를 새겨 넣는 조각실을 둘러본 뒤, 맨 끝 방의 문을 열었다.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쪼그려 앉아 있는 사내의 등이 보였다. 이용희씨였다. 그는 초벌구이를 끝낸 ‘황토색 청자’를 연신 유약 통에 담갔다가 꺼내곤 했다. 그래야 유약이 고르게 묻는다고 했다. 그런데 유약의 색깔이 상상하던 것과 달랐다. 푸르기는커녕 미숫가루처럼 누르스레했다.

“이게 청자의 색깔을 좌우하는 그 유약입니까?”라고, 다소 무식하게 묻고 말았다. 그가 옛 청자색을 재현할 수 있는 자연 유약을 개발했다는 오래된 기사가 생각나서였다. 기습당한 듯 눈만 꿈벅거리던 이씨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흔히 그렇게 알죠. 그런데 청자의 색을 정하는 건 유약만이 아닙니다. 태토(흙)가 제일이고, 유약과 불의 균형이 맞아야 청자의 색이 살아납니다.”

이씨에 따르면, 청자 한 점을 완성하려면 스물네 단계를 거쳐야 한다. 성형, 조각, 초벌구이, 유약 바르는 작업, 그늘에서 말리기, 본벌구이···. 그리고 “청자의 푸른색은 철 성분이 많은 강진의 흙과, 이곳의 돌을 빻아 만든 유약이, 1,280~1,300℃ 불 속에서 50여 시간 동안 구어지고 녹아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배어난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이씨가 청자와 맺은 인연은 독특하다. 제대하고 집에서 농사짓던 청년 이씨는 어느 날 집 뒷산에서 도자기 파편 한 점을 주었다. 이곳이 고려시대 관요 터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청년의 파편 수집은 본격화했다. 그것들은 이내 고려청자 파편이었음이 밝혀졌다.

1964년 봄, 그의 집 뒤뜰에 발굴현장사무소가 차려졌다. 최순우(작고)·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 문화재계의 대가들이 그의 집을 들락거렸다. 그는 잡부로 발굴에 참여하며 학자들의 대화를 귀동냥했다. 이야기는 들을수록 구미가 당겼다. 그는 스스로 청자를 빚어보리라 결심했다. 조상 중 누군가가 고려시대 청자 도공이었을지도 몰랐다. 

매형에서 처남에게로 명맥 이어져

발굴이 마무리될 무렵 그는 짐을 쌌다. 청자를 굽는다는 고현 조기정 선생이 광주에서 ‘무등요’를 운영하고 있었다. 고현은 대학 졸업 뒤 고려청자를 재현하겠다는 일념에 일생을 바친 이다. 이씨는 고현에게 흙 고르는 법과 유약 만드는 법, 불 때는 법을 배웠다. 경기도 이천에 사는 해강 유근영 선생(작고)과 혁산 방철주 선생에게도 찾아가 배웠다.

1978년, 이씨는 강진군 도움으로 이곳에 가마를 짓고, 스스로 개발한 유약을 발라 비색 청자를 32점 구워냈다. 옛 청자가 재현되었다는 소식에 전국이 떠들썩했다. 이후 지금껏 그의 손으로 빚은 청자만 50여만 점, 그 중 일부는 옛 청자의 품격을 빼닮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2001년에는 전남대 연구팀이 그의 작품을 원소 분석한 결과, 유약과 흙의 성분, 색의 명암 등에서 고려시대 청자와 거의 같다고 발표했다. 2년 전 그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청자장’으로 지정되었다.

 
여름 이후 이씨로부터 가마를 인수하는 윤재진씨(54)는 이씨의 처남이다. 윤씨 역시 이씨와 마찬가지로 이 마을 출신이다. 그는 중학교를 마친 직후부터 광주 무등요에서 흙 만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군대에 다녀온 뒤인 1978년 이씨의 부름을 받았다.

윤씨는 이씨 밑에서 길 닦고 가마 짓는 잡부 일부터 시작했다. 흙을 걸러내는 수비 과정과 성형 보조, 성형, 조각 보조, 조각 등을 두루 거친 뒤에야 이씨는 윤씨를 제자로 인정했다. 2000년부터 윤씨는 무형문화재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 9월 말 이씨가 정식으로 은퇴하면 윤씨가 작업 인원 20여명을 이끌고 청자 제작의 책임을 떠맡게 된다(강진요는 강진군 소속으로 사업소장을 비롯한 행정 공무원들이 따로 있다).

“경기도 이천 도자기축제에는 창작품이 많이 출품된다. 그러나 우리는 관요이고, 또한 고려청자를 재현한다는 목적 때문에 창작품에는 소홀한 면이 있었다. 앞으로 창작품을 많이 개발해 청자의 현대화에도 기여하고 싶다”라고 윤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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