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통곡하고 있다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5.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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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영·이은상 등 친일파와 수구 세력이 숭모회 이사장 도맡아…“숭모회는 안의사 모독회”
 
1979년 10월26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殿堂)’이라는 자신의 휘호가 새겨진 비석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25일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이 남산에 나가 사전 담사를 마쳤다. 박대통령은 사전적 의미인 ‘民族精氣’를 ‘民族正氣’로 썼다. 일부에서 친일파로 지목되는 박대통령이 반민족특위의 구호를 사용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오기(誤記)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정부는 안중근 의사 탄생 100돌을 기념해 대대적인 추모 행사와 함께 안중근 숭모 사업을 벌였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안중근 의사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1979년 안중근의사숭모회(숭모회·이사장 황인성) 당시 이사장 이은상 씨의 건의로 ‘안중근 의사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회에는 당시 고 건 청와대 정무무석, 김성진 문공부장관, 정상천 서울시장이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1979년 9월2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최규하 국무총리의 주재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축전’이 열렸다. 이 행사에는 만명이 넘는 사람이 동원되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기념관 개관식 일정을 취소하고 삽교천에 갔다. 그리고는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총에 맞아 숨졌다. 이 날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살해한 지 꼭 70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안중근 의사 성역화 사업도 중단되었다. 숭모회 김광시 사무처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역사적 인물을 우상화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기반을 닦았다는 비판은 있다. 하지만 박대통령이 죽은 후 안중근 등 역사적 인물을 모시는 사업이 끝나버렸다는 점도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곽태영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대표는 “박정희는 일본 관동군 장교로 일본 제국주의 승리를 위해 복무했던 인물이다.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가 쓴 친필 기념비가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정문에 걸려 있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숭모회측은 “안의사는 이념가가 아니고 평화주의자다. 박대통령과 다른 숭모회 분들의 친일에 대해 이해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안중근 의사의 정신이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안의사의 위대함에 비해 학문적 성과는 초라하다.
민족사학의 태두 박은식은 1914년 발간한 <안중근전>에서 “안중근은 세계적인 안광(眼光 :식견을 뜻함)을 가지고 스스로 평화의 대표로 나선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안중근은 순국 후 불과 3주 만에 전기가 출간되어 널리 읽혀질 만큼 존경을 받았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안중근은 청년학생 사이에서 뇌리가 아플 정도로 심각하게 박혀 있다. 안중근의 사진을 담은 그림엽서와 복사지가 불령분자들의 가택을 수색할 때마다 나오지 않는 집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광복 후까지 이어졌다. 1946년 3월2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안의사 추모식에는 무려 1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 현대사에서 남한과 북한을 불문하고 안중근 의사처럼 존경받는 인물은 많지 않다.

“숭모회가 안의사 관련 사업 도리어 왜곡”

그러나 지금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테러리스트’, 약지가 잘린 손바닥 도장과 ‘대한국인’이라는 글씨 정도로만 아스라히 기억될 뿐이다.
숭모회는 이러한 원인을 안의사 숭모 정신이 투철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데서 찾았다. 숭모회 최명수 사무국장은 “박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기념관이 건립된 이후 지원이 변변치 않아 안의사와 관련한 사업을 벌이기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친일 인사와 수구ㆍ기득권 세력에 의해 숭모회의 안의사 관련 사업이 왜곡되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1963년 숭모회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지낸 윤치영. 민족문제연구소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서 윤치영을 ‘외세와 독재 권력에 아부하여 잘 먹고 잘 산 자의 표본이다’라고 규정했다. 윤치영은 이동치영(伊東致暎)으로 창씨개명하고 임전대책협의회에 적극 참가해 침략 전쟁을 찬양했다. 윤치영은 1942년 <동양지광> 3월호에 ‘싱가포르 함락을 경축함’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 세기적 경사를 당해서 더한층 대일본제국의 위대한 업적과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억일심……대일본제국의 위대한 사명을 세기적 경축과 함께 발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광복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45년 이승만 박사 비서실장을 시작으로 제헌 의원·초대 내무부장관·국회 부의장·민주공화당 의장·서울시장·제3,4,5대 대한민국헌정회 회장…. 윤치영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지만 광복 후 독립 유공자로 둔갑해 1982년 독립유공건국포장을 받았다. 1984년에는 독립유공자유족중앙회 고문과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를 지냈다.
윤치영 집안이 걸어온 길은 안의사 집안과 사뭇 대조적이다. 윤치영의 큰형 윤치오와 둘째 형 윤치소는 차례로 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셋째 형 윤치성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구한국군 기병중장을 지냈다. 윤치영의 백부 윤웅렬은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 직위와 매국 공채 2만5천원을 받았다. 윤웅렬의 장남 윤치호는 노골적인 매국의 길을 걸은 대가로 1945년 조선 내 일본 귀족 7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골수 친일파 윤치영이 숭모회 설립

 
안의사의 동생들은 백범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사촌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탈옥했다가 체포되어 발목을 잘리기도 했다. 또 통일운동에 나섰다는 이유로 5·16쿠데타 이후 투옥되었다가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급조한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이도 있다. 최근에는 방치되어 있던 안의사 여동생 묘지가 발견되었다. 안의사 여동생의 유언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었다.

2대 숭모회 이사장을 지낸 이은상은 친일어용신문인 <만선일보>에 재직했고, 친일 잡지 <조광>의 주간을 맡았다. 하지만 1977년에는 건국포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시조작가협회장과 5공화국에서 국정자문위원을 지냈다. 
일제 시대 경제 침탈의 본부였던 조선은행의 간부를 지낸 백두진 전 이사장은 40대에 재무부장관과 국무총리 서리를 지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유신 옹호의 기수가 되어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은상과 백두진은 국립공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안의사 기념관 앞에 서 있는 안의사 동상은 대표적인 친일 미술가 김경승의 작품이다. 김경승은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목적으로 탄생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김경승은 이승만 정권 때 이순신 동상과 안중근 동상을, 박정희 정권 때에는 김 구 동상과 안창호 동상을, 전두환 정권 때에는 전봉준 동상을 만드는 등 조각가로서 영광도 독차지했다. 수유리에 있는 4·19기념탑도 그가 만들었다. 전두환 정권 때 김경승은 10년 동안 평통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중근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는 신운용 박사는 “친일파가 주축이 된 숭모회는 친일에 대한 반성 없이 안중근 의사를 팔고 다녔다. 안중근이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와 이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숭모회측은 “친일 행각은 안의사 숭모와는 차원이 다르다. 예술가가 행실이 나빠도 작품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 전 이사장들은 반성과 회개 차원에서 안중근 숭모 사업에 많이 기여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숭모회 이사장을 맡은 인사들도 안의사의 독립투쟁 정신에 부합하기보다는 권력의 양지만을 좇은 사람이 대다수다. 정원식 전 숭모회 이사장은 교육부장관 재직시 1천5백여 전교조 교사를 교단에서 몰아내어 ‘대량 학살의 주역’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1991년 총리로 임명된 후 한국외국어대에서 학생들로부터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동아일보 인물 정보에 따르면, 정 전 총리는 존경하는 인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을 꼽았다.

노신영 전 이사장은 외무부장관·국무총리·민정당 고문을 역임했다. 노씨는 1982~1985년 안기부장을 맡아 5공화국의 충복 노릇을 했다.

“안의사 숭모회는 박정희 숭모회에 가깝다”

 
숭모회 현 이사장인 황인성 전 총리는 1947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박정희 정권에서 국방부 재정국장, 전북 도지사,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이후 민정당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부이사장으로 있는 안응모 전 내무부장관은 5·6공에서 치안본부장·조달청장·안기부 차장 등을 지냈다. 안부이사장은 2000년 출범한 대표적 보수·우익 단체 자유시민연대의 대표적 인사로 활약하고 있다. 자유시민연대는 ‘일제 식민 지배는 축복이다’라는 망언을 한 고려대 한승조 교수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단체. 안부이사장은 최근 MBC 시사 프로그램 <PD수첩>에서 자녀·손자가 국적을 포기한 전직 고위 관료로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보수계의 원로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상임의장도 숭모회 고문이다. 숭모회 고문으로 있는 박보희씨는 한때 문선명 총재와 함께 통일교를 대표한 인물. 현재 사기죄로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박귀언 이사도 통일교 인사다.
<시민의 신문> 정지환 취재부장은 “대표적인 친일파인 윤치영이 안중근 숭모회 대표였다는 것은 역사와 안중근 의사를 모독하는 행위다. 안중근 숭모회는 박정희 숭모회에 가까워 안의사 추모 사업 등에 대해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워 보인다”라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국가보훈처의 관리·감독이 허술해 안중근의사에 대한 숭모·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말했다.

숭모회의 이율배반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이 판매하고 있는 안중근 도록에는 동해를 일본해로 기록한 지도(73쪽)가 수록되었다. 내선일체를 실현하기 위해 일제가 건설한 조선신궁 터에 숭모회가 안의사기념관을 세운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2010년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정부는 안중근 의사 사당 및 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정부 예산 1백50억원이 책정되었다고 한다. 숭모회의 한 관계자는 “숭모회가 각계각층이 참여한 건립추진위를 구성해 내년부터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우선 올해 8억5천만원을 투입해 설계를 마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 뵐 낯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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