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붉은 이슬’ 담글 수 있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5.08.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와인의 달인 윤권상 교수가 제시하는 ‘집에서 와인 만드는 비법’

 
 세상에는 묘한 사람이 적지 않다. 미생물학자인 윤권상 교수(64·강원대)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주량은 와인 두 잔 정도. 이제껏 그 이상을 마셔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는 25년째 집에서 술을 담그고 있다. 술도 그냥 술이 아니다. 독특한 맛과 향기 때문에 개인이 담그기 어렵다는 와인이다. 무엇 때문에 그는 1년 내내 포도를 숙성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포도주용 포도가 거의 생산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와인 담그기가 가능할까.

 춘천시 남춘천역 부근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예상했던 대로 와인 병이 가득했다. 작은 방에는 제조를 끝낸 와인 100여 병과 제조 기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거실에는 숙성 중인 붉은색 와인을 담은 20ℓ짜리 생수통이 줄지어 있었다. 생수통에 담긴 미완성 와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가정에서 소주와 설탕을 듬뿍 부어 만든 포도주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른 점이 있었다. 삭은 포도 알갱이가 보이지 않았고, 통 바깥에 원액을 주입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렇게 1,2년 숙성시킨 뒤, 와인 병에 담아 완제품을 만든다”라고 윤교수는 말했다. 그가 내미는 완제품을 보니 시중에서 판매하는 와인과 거의 똑같았다. 단정한 병 입구의 포장도, 병 허리에 붙은 라벨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라벨에 박힌 내용이었다. 라벨 위쪽에는 ‘Gift Bottle'과  '홈 메이드 레드 와인’이라는 문자가 박혀 있었다. 그 아래로는 작은 난초 화분 하나와 'Red Dew 2004' ‘캠벨 포도주 11.5% alc, 75cl’ ‘Vinted By Prof. KS Yoon. Chunchon, S. Korea'라는 문자가 보였다.
 'Red Dew'(붉은 이슬)는 윤교수가 만드는 와인의 비공식 상품명이다. 그가 마개를 뽑고 붉은 이슬을 유리잔에 따라주었다. 붉은 이슬이 찰랑거리는 잔을 코끝에 갖다 대니 달콤한 캠벨 향이 콧속 가득 스며들었다. 붉은 이슬을 입안에 살짝 부은 뒤 혀끝을 살살 움직여 보았다. 의외로 깔끔하고 개운한 맛이 났다. 뒤끝에 약간 신맛이 남았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술맛이 깔끔하다’고 말했더니 윤교수가 말을 받는다. “캠벨 포도주만큼 한국의 보통 사람들 입맛에 맞는 와인은 없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단다. 우선 원료인 캠벨 포도(당도가 13 정도 되고 과즙과 신맛이 좀 풍부한 품종)가 한국인들의 입맛에 잘 어울린다. 100여 년 전 한국에 상륙한 캠벨은 지금도 국내 포도 생산량의 65%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 덕에 캠벨의 풍성한 향과 달콤새콤한 맛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하다.

바나나·오디·매실로도 와인 만들어

 그러나 외국산 고급 와인을 즐겨 마시는 사람들은 예외인 것 같다. 언젠가 윤교수는 이름 있는 호텔의 소믈리에에게 붉은 이슬에 대한 품평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돌아온 평가는 간단 명료했다. “진한 과일 향은 와인의 결격 사유다. 그런데 캠벨 와인 향은 너무 무겁다.”  

 그렇다고 기가 꺾일 그가 아니었다. 와인 학교에서 제조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또 전통 있는 기법으로 대량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한다. 당연히 맛과 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지금은 1년에 포도 200kg으로 1백50여 병(750㎖ 기준) 분량의 와인을 담글 정도로 ‘가정 와인’의 달인이 되었지만, 그가 처음 와인을 만들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1980년 초, 그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해 겨울 어느 날,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늦은 밤 학교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낯선 미국인이 다가왔다. 그는 다짜고짜 자기 차가 시동이 안 걸린다며 집까지 태워다 달라고 부탁했다. 윤교수는 주저 없이 그를 옆자리에 앉혔다. 미국인을 집앞에 내려놓고 막 핸들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그가 윤교수에게 잠깐 몸을 녹이고 가라고 말했다. 집안에 들어선 윤교수에게 미국인이 내민 것은 따뜻한 차가 아니었다. 핏빛보다 더 진한 진홍색 와인이었다.

 와인은 맛과 향이 독특했다. 윤교수가 어떤 와인이냐고 묻자 미국인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집에서 자기가 담갔다는 것이 아닌가. “단 한 번에 그 맛과 향에 반했다. 다음날부터 당장 그 미국인에게 와인 담그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라고 윤교수는 돌이켰다. 이후 20년 넘게 와인 만들기는 그의 취미이자, 놀이이자, 실험이자, 긍지가 되었다.

 
 최근 윤교수는 자신의 와인 만들기 경험을 모아 왕초보에서 전문가까지 따라 할 수 있는 <정통 와인 만들기>(야스미디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책에서 와인 만들기의 즐거움을 이렇게 자랑했다.  ‘내가 사온 과일을 이용해서 발효액을 준비하고, 발효 기간에 탄산가스 발생의 생명력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6개월 이상 혹은 1년간 느긋하게 기다린 뒤에 나타나는 내 브랜드 와인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와인을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신비감마저 든다. 그런데 더 좋은 기분 좋은 일은 존경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만의 라벨을 붙여 와인을 선물할 때다. 그때 경이적인 찬사가 쏟아진다. “이걸 정말 만드셨어요?” 얼굴에 신기함과 의구심이 가득하다.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집에서 와인을 만든다고 믿겠는가.’

 그에 따르면, 와인 만들기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적어도 6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쉽게 지치거나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보석’을 맛볼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 와인 담그기는 과학이기도 하다. 숙성 때의 온도, 발효 과정에서의 설탕이나 효모 첨가 등등 어느 것 하나 대충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와인 담그기가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 하면 누구나 쉽게 나만의 와인을 즐길 수 있다. 포도주뿐만 아니다. 다른 과일로도 얼마든지 와인이나 샴페인을 만들 수 있다. 그의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바나나 원액이 고소한 향기를 풍기며 숙성되고 있었는데, 그는 달력을 넘길 때마다 와인의 재료인 계절 과일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예컨대 2,3월에는 하우스 딸기, 4~5월에는 노지 딸기, 6월에는 오디·매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윤교수는 와인 담그기를 주 5일 근무로 쉴 참이 많아진 30,40대 가장에게 특별히 권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와인 담그기의 황홀감을 맛볼 수 있다. 가장들에게 이보다 더 고급한 취미는 없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