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반란군 토벌에 성공한다면 한반도에는 어떤 영향?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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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외교관들의 발언은 곰곰이 씹어보아야 한다. 언뜻 들어서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힐 차관보가 1주일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더 분명해졌다. 지난 8월10일 워싱턴 포린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에서 그는 ‘평화적 핵 이용권’은 허용할 수 없다며 북한에 각을 세웠다. 8월17일 워싱턴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연설에서는 톤이 바뀌었다. 북한이 관심을 갖고 있는 평화협정 문제를 끄집어냈고 훨씬 유화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언론의 관심이 모두 그쪽으로 쏠린 것은 당연하다. 


덕분에 그가 1주일 사이에 ‘똑같은 말’을 뜬금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묻혀 지나갔다.  ‘북핵과 관련한 당사국간 원칙 합의가 빠르면 9월 후반, 늦어도 10월 중에는 결론 나길 희망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뒤집어 보면 8월 말 시작될 4차 6자 회담 2단계 회의에서는 어렵다는 얘기가 아닌가. 힐이 언급한 ‘9월 말’은 그 한 달 후인 것이다.


같은 말을 같은 형태로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라이스에서 힐로 이어지는 미국 외교 사령탑에게 이 문제가 그만큼 절실하고 중요하다는 뜻이다. 자기들 계산으로 도저히 9월 말 이전에는 어려우니 양해해 달라는 뜻으로 들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도쿄의 당국자들에게 는 ‘당신들 때문에 9월 말까지로 늦췄으니 그 안에 체제를 갖추라’는 압박일 수도 있다. 9월 말 안에 일본의 ‘9·11 총선’이 있다. 여기까지는 봐줄 것이나 그 이상은 안된다는 데드라인이 바로 ‘9월 말’인 것이다.  9·11 일본 총선의 향방에 미국을 비롯한 동북아 국가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9·11 총선의 경과
:지난 8월8일 일본 참의원의 우정개혁법 부결과 고이즈미 총리의 중의원 해산으로 전개된 선거 정국에 대해, 일본 언론이나 정치 평론가들의 관점은 시시각각 변해 왔다. ‘자폭 해산’ 또는 ‘자포자기 해산’. 이는 우정개혁법 부결로 고이즈미가 궁지에 몰렸다는 설정이었다. 고이즈미 시대는 끝났고 민주당 시대가 활짝 열린 듯했다.


‘고이즈미의 서프라이즈 정치’.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정 민영화는 옳다.’ 갈릴레오를 흉내낸 고이즈미의  연설 이후 그의  인기가 오히려 상승하자 ‘서프라이즈 정치(충격 정치)의 달인 고이즈미’가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그가 처음부터 치밀한 각본에 따라 중의원을 해산했다는 ‘기획해산설’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중의원 해산 직후, 자민당 내 반대파인 ‘37인의 사무라이’를 타도하기 위해 도쿄대 하버드 대학 출신에다 미모의 재무성 관료 방송 캐스터, 얼마 전 후지 TV 인수전에 뛰어들어 화제가 된 벤처기업인 등 ‘준비된 자객’들을 속속 투입하는 것을 보면서 사전준비설이 힘을 얻고 있다. 


도쿄의 한 소식통은 일본 언론과 정치 평론가들이 고이즈미 총리를 뒤쫒아가기 급급하다고 꼬집었다. 참의원에서 우정개혁법이 부결되었다고 중의원을 해산할 때부터 알아보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정개혁법이 목표였다면 중의원으로 다시 회부해서 통과시키면 됐다.   이 과정을 생략한 것은 처음부터 자민당내 반대파를 일소하고 정치판을 새롭게 짜겠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정당으로 변모하는 자민당?: 고이즈미의 ‘정치 혁명’은 무엇을 노리나? 최근 <동아정경 리포트>라는 동북아 정치 평론지를 발행한 노 다니엘 씨는 고이즈미 총리를 ‘일본 정계에서 가장 사무라이적인 기질의 소유자’라고 평가하면서, 총리 취임 초기부터  ‘자민당을 지배해온 다나카-다케시타 파벌(이른바 經世會, 지금은 平成硏究會로 바뀌었음)을 제압하는 데에 최대의 정치적인 목적을 두었다’고 지적했다. 다나카-다케시타로 이어져온 이 파벌은 최근까지 구 하시모토파(전체 85명)로 맥을 이어온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 일성으로 제시한 ‘우정 개혁’과 ‘자민당을 깨겠다’는 목표는 모두 하시모토파를 비롯한 자민당의 반 고이즈미 파벌을 겨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금융 자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3백50조 엔을 가지고 있는 일본 우정공사야 말로 하시모토파를 비롯한 이들 파벌의  돈 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정개혁법이 통과되면 이들은 자연스레 약해질 것이고, 이들의 반대로 무산되면 반개혁 세력으로 몰아갈 호기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연사 아니면 타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셈이다.


일본 국민의 반응이 흥미롭다. 일본 언론의 서울 주재 특파원은 “국민들은 사실 우정 개혁에 관심이 없다. 정치인들끼리나 문제가 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국민들 처지에서는 지금의 우체국 시스템이 훨씬 편리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고이즈미의 인기가 오르고, 심지어 직전 선거에서 자민당을 누르기도 했던 민주당마저 관심권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존 파벌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염증을 고이즈미 총리가 꿰뚫어보고 선수를 쳤기 때문이다.
도쿄의 한 소식통은 자민당의 파벌 정치가 지역의 기득권을 가진 특권 세력의 거대한 집합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다나카 총리 시절 일본은 대대적인 지역 개발에 착수했다. 이때 일본 도로공사와 유착한 토호 세력을 중심으로 자민당의 파벌 정치가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을 반대한 37인의 사무라이를 저격할 자객을 파견하는 과정에서 자민당의 기존 인재 충원 방식을 철저히 배격했다. 지금까지는 지방의 토호 세력이나 기득권 세력을 중심으로 구회 의원 대상자가 충원된 데 반해, 이번에는 '텔레비전 시대'에 걸맞는 대중적 스타들을 중앙당 차원에서 직접 낙하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당연히 이들은 고이즈미 총리와 코드를 맞춘 고이즈미 사람이고, 이들이 대거 당선될 경우 자민당은 고이즈미의 정당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하시모토파니 가메이파니 하는 기존 파벌들이 속속 해체되고 있고, 이런 추세로 가면 고이즈미 총리가 내년 9월의 임기를 넘어 장기 집권할지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게이오 대학 동아시아연구소 고쿠분 료세이 소장이 한 칼럼에서 지적한 표현을 인용하면 ‘(일본의 정치가) 마침내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파벌 정치 해소가 뜻하는 것: 기존 파벌이 해체되고 자민당이 고이즈미 정당화한다는 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일본의 한 정치 평론가는 “파벌 정치가 해소된다는 것은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두렵기도 하다”라고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기존의 파벌 정치인들은 보수적이기는 해도 일본 우경화, 자위대 해외 파견, 헌법 9조 개헌 등에는 소극적이었다. 즉 고이즈미 정부가 그 방향으로 가고자 해도 의회에서 제동 장치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파벌이 해체되고 대중의 감성에 민감한 ‘텔레비전 스타’들이 속속 진입하면 자민당은 제동 장치가 풀린 일사불란한 정당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한마디로 고이즈미 총리의 입 맛대로 움직이는 ‘일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기시 노선 부활: 동북아와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짚어보기 위해서는 고이즈미가 속한 ‘?和會’의 정치·사상적 원조인 기시 노부스케라는 인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청화회는 고이즈미가 속해 있는 모리파(76명)를 일컫는 말로, 모리-후쿠다 전 총리에 이어 기시 노부스케로 거슬러올라가는 자민당 내 우익 파벌이다. 고이즈미는 후쿠다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고,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대리는 기시의 외손자이다.
‘구 만주국 정부 시절 산업계의 실질적 지배자.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장관 역임. 패전후 A급 전범으로 복역. 1957년 일본 총리 취임 이후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추구하다가 국민적 저항을 받고 사퇴.’ 이같은 전력이 말해주듯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야 말로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의 원조 격인 인물이다.


 
그가 제시한 ‘일본호’의 미래가 ‘기시 노부스케의 전후 일본 설계’라는 이름으로 1990년대 중반 일본 정계에 떠돌았다고 한다. 일본 정치에 정통한 도쿄의 한 소식통이 전하는 그의 전후 설계는 ‘중형제국주의론’으로 집약된다. 한마디로 전후 일본이 살길은 중간 규모의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나 당시의 소련 같은 초제국주의가 아니라 중간 규모의 제국주의로 최소한 동남아나 타이완 그리고 한반도를 포함하는 아시아의 맹주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과 친하게 지내고 궁극적으로 아시아에 대해서는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처방도 제시했다.


이 중형제국주의론은 요시다 시게루 같은 자민당 주류의 경무장 고도성장 노선에 맞선 중무장론으로 이어졌고, 헌법 9조 개헌, 집단적 자위권 보장, 자위대 해외 파병 같은 일본 우익의 국가개조론에서 골격을 이루었다.
또한 다나카-다케시타로 이어진 자민당 구주류의 친 중국 노선에 맞서, 미·일 동맹을 중시하며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반중국 노선으로 표출되어 오기도 했다. 이는 아시아 맹주를 지향하는 기시의 중형제국주의론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라 할 것이다. 
고이즈미의 자민당 지배가 강화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자민당의 반 중국 우경화 행보가 더욱 거침없이 표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다.


아베 신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 ; 사실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 일본의 우경화는 이미 대세이고, 어떤 면에서 고이즈미가 되는 것이 낫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자민당 내 반대파 37인은 거의 대부분 대북 강경파이기도 하다. 그동안 납치 문제를 빌미로 고이즈미 총리의 북·일 교섭 행보를 가로막았던 인물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이 일소될 경우 고이즈미가 재차 대북 행보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다.
문제는 정작 기시 노부스케를 공동의 원조로 하는 청화회 내부에 있다. 바로 아베 신조를 중심으로 한 일본판 네오콘과 방위족 연합 세력을 고이즈미 총리가 과연 제압할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다. 지난해 연말부터 최근의 6자 회담까지 일본 외교를 좌충우돌의 형국으로 몰아간 세력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조성렬 박사는 같은 기시의 후예라고 해도 고이즈미 총리나 모리 전 총리 등의 정치인, 외무성 내각조사실 등을 다시 세분해 ‘아시아파’로 구분하기도 한다. 반면 아베 신조를 정점으로 한 이들 세력은 미·일동맹파로 세분한다. 아시아파가 중국과는 대립하되 전략적으로 한국이나 북한 등 한반도에 대해서는 외교적으로 포용하는 입장을 띠는 데 비해 미·일 동맹파는 이를 무시하고 군사 노선으로 질주해온 경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이 미국을 중시하는 것은 중국에 맞서는 군사력을 획득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는 전전의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연상케 한다.
지난해 12월8일 북한 유골 사건을 비롯해 올해 초 독도 문제와 교과서 왜곡 파문 등의 배경에는 군사 예산 확충을 위한 내부 분위기 조성을 위해 대외적 충돌을 활용하려 한 이들의 불순한 동기가 숨겨져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 과정에서 북·일 수교 교섭을 재개하려던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 노선이 무력화하기도 했다.
이들 세력의 준동에 대해서는 이미 미국도 골치 아파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라이스-힐로 이어지는 국무부 처지에서는 이들 세력이 체니·럼스펠드 등과 선을 대고 6자 회담 등 북핵 문제 해결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나 북한 그리고 한국 정부에게도 역시 이들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앞의 힐 차관보로 다시 돌아가 보자. ‘9월 말, 10월 초’라는 일정 제시와 함께 느닷없이 평화협정 얘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일까. 평화협정은 남북한과 미국 중국, 즉 넷이 주축이다. 6자 회담 참여국 중 일본과 러시아가 빠지는 것이다. 거의 동시에 베이징에서는 더 직설적인 얘기가 들려온다. “아베가 마음을 바꿔먹든지, 아니면 고이즈미 총리가 아베와 결별하든지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6자 회담은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일본이 빠진 4자 회담도 중국은 각오하고 있다.” 고이즈미는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아베를 비롯한 주변 세력의 준동을 차단할 수 있을까. 그의 행보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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