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남자들아
  • 고영직(문학 평론가) ()
  • 승인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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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귀뚜라미가 온다>/일탈적 연애로 본 사랑의 관계학

 
연애 혹은 사랑이란 타자성의 체험이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을 통한 완전한 타자성의 체험을 몽상한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에 관한 몽상은 당신의 착각에 불과하다. 당신이 그러한 연애의 몽상을 꿈꾸는 남자라면, 그러한 연애의 상상이란 얼마나 도착(perversion)적 욕망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백가흠 소설 <귀뚜라미가 온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여자와 연애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 연애 혹은 사랑의 방식은 ‘비정상’적 일탈로 보인다. 가학과 피학적 사랑이 작품 전편에 편재되어 있는가 하면, 폭력·살인·강간·신성모독 따위의 잔혹사들이 작품 전면에 나타난다. ‘엽기적’인 엽색 행각이라고 말해도 좋을 법한 사랑의 관계를 엿볼 수 있으며, 그러한 남자들이 자행하는 유형·무형의 폭력들은 적나라하다. 한마디로 1974년생 작가 백가흠의 작품을 보는 독자들은 은연중에 불쾌한 감정에 빠지게 될지 모른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백가흠 소설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문법과 닮았다고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데뷔작 <광어>에는 룸살롱 ‘환희’의 여급 미스 정을 사랑하는 횟집 요리사가 등장한다. 그가 스무 살짜리 여급 미스 정을 사랑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어머니의 기억이란 아예 없다. 그리하여 그는 미스 정과의 사랑에서 ‘엄마의 자궁’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곳이 그리워 당신의 안으로 들어갔다.”(19쪽) 그렇지만 엄마의 변형태인 미스 정은 낙태 수술 후, 남자가 마련한 5백만원이 든 통장을 들고 홀연히 떠나버린다. 또다시 그는 버려진 것이다. 이처럼 백가흠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의 의식·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일종의 분리불안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탓인지 남자 주인공들은 대체로 심한 말더듬증은 물론 육손이 따위의 정신적·신체적 결함을 갖고 있고 있다.

 
‘엄마 발견’이라는 모티프는 이 소설집의 전편을 지배하는 플롯의 법칙이다. 백가흠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은 늙은 연상 여자(<귀뚜라미가 온다>와 <2시31분>), 맹인 여자(<구두>), 이국 창녀(<배(船)의 무덤>) 등등 ‘비정상적인’ 여자들과의 사랑에서 엄마의 기억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왜 그들은 유아기적 욕망에 집착하는 것일까. “니가 엄마도 하고, 마누라도 하고, 다 하면 될 거 아이가. 가정이 내 인생의 목표다.”(<귀뚜라미가 온다>, 49쪽)라는 진술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엄마에 관한 그들의 회귀 욕망은 <전나무숲에서 바람이 분다>라는 작품에서 회귀성 어종인 연어류에 비유된 바 있다. 그래서 ‘귀어연’이라는 상상 공간은 저 모궁(母宮)의 세계라는 유아기적 상태로 퇴행하려는 그들의 이상일 터이다. 즉 귀어연은 귀어연(歸魚淵)이 아니었을까.

유아기적 사랑이란 실현 불가능한가

유아기적 사랑이란 실현 불가능한 남성 주체의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남자 주인공들은 이 유아기적 사랑 욕망이 좌절되는 순간에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다. 강간, 자살, 일가족 살해, 근친 살인, 연쇄살인, 생매장 따위의 폭력들이 작동하는 근저에는 유아기적 퇴행 욕망의 좌절이 있다. <구두>에서 일가족을 살해한 남자가 맹인 여자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곳이 ‘환타지아 안마’라는 곳이었다는 점은 사소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남자는 그녀를 강간한 뒤 자살하게 된다. <배(船)의 무덤>의 경우 바다표범의 살상 행위와 생매장되는 남자의 모습이 겹쳐지는 대목에서 몸서리쳐지는 표현을 얻게 된다.

<배꽃이 지고>라는 작품은 과수원집의 유일한 ‘정상인’인 주인이 ‘비정상인’인 나머지 세 명의 사랑과 노동을 적나라하게 착취하는 장면에서 잔혹사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자신의 관절염 치료를 위해 먹는 ‘젖’을 얻기 위해 영아를 살해하는 과수원집 주인의 잔혹한 행각은 과연 누가 정상인이고 비정상인지를 날카롭게 대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입니다’라는 종결어미는 그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을 무심한 듯한 진술 방식으로 서술하기 위한 형식미학이 될 터이다. 결국 작가는 진정한 타자성을 체험할 수 있는 사랑의 관계학을 열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문제의식을 ‘숙수(熟手)의 솜씨’(오정희)로 요리할 줄 아는 젊은 작가의 상상력이 무척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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