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먹는 랭면, 와락 먹는 냉면
  • 성석제(소설가) ()
  • 승인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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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여러분, 평양에서는 우리가 냉면이라고 알고 있는 음식을 ‘평양랭면’이라고 불렀습니다. 5박6일의 일정, 열다섯 끼를 먹는 동안 제가 먹은 랭면은 여덟 그릇이었습니다. 이 정도로는 우리 냉면광 동지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싶어 북에 머무르는 내내 한 그릇, 한 올의 냉면이라도 더 먹으려고 진력했습니다만 일정상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데다 함께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고려항공 전세기는 50분 만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평양의 최고급 호텔이라는 고려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2시가 넘었고 1층 로비에서 한복을 입은 종업원들이 박수로 우리를 맞았습니다. 곧장 식당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식당 입구에 써 있는 글자가 ‘랭면’과 불고기였습니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 흰 식탁보가 깔린 탁자 앞에 앉자마자 지체없이 김치와 녹두지짐이 날라져 왔습니다. 김치는 남쪽의 배추김치와 백김치의 중간쯤이라고나 할지, 아니 배추김치에 가까운데 물이 많은 김치로 한 사람이 먹을 만한 양이 그릇에 담겨 있었습니다. 젓갈을 쓰지 않은 듯 맛은 담백했고 고춧가루의 붉은색은 옅고 흐린 편이었으며 약간 신맛이 느껴졌습니다. 녹두지짐은 평양에서 자랑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라고 하더군요. 아이 손바닥만한 크기로 두 장이 나왔는데 돼지비계와 씻은 김치, 파, 마늘의 맛이 느껴졌습니다. 이어서 불고기가 나왔지요. 남쪽의 1인분에는 조금 못 미칠 듯한 양이었습니다. 양념에 재어 물기가 많은 것을 끓여 먹다시피 하는 남쪽 불고기와 달리(이래서 남쪽 불고기를 물고기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념을 고기에 발라서 제대로 구운 것 같았습니다. 제주도 형님 말마따나 전복죽에서 전복을 건져내고 죽만 먹던 제가 고기 맛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덮어놓고 입맛에 영합하려 하지 않는 깔끔한 맛이었습니다.

드디어 평양랭면이 나왔습니다. 놋그릇에 담긴 평양랭면은 1인분이 200g이라고 합니다. 추가를 하면 100g이 더 나옵니다. 물론 저는 첫 번째 냉면 그릇이 놓일 때 추가 주문을 했습니다. 메밀국수는 생각보다 가늘었고 색깔은 짙은 회색이었습니다. 언젠가 뉴욕 형님이 면은 서울 마포의 ‘을밀대’ 것이 제일 나은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에 비하면 3분의 2쯤의 굵기였습니다. 을밀대 면처럼 평양랭면의 면도 이로 끊기는 합니다만 예상보다는 질겼습니다. 가위는 보이지 않았고 저도 자를 생각은 없었습니다. 얌전하게 놓인 국수 위에 먼저 쇠고기와 돼지고기 편육이 놓였고 그 위에 버들잎 모양의 배와 오이 그리고 달걀지단을 마름모꼴로 썬 것과 실처럼 가늘게 썬 것 - 실닭알이라고 합니다 - 을 얹었습니다. 남쪽의 냉면 김치처럼 김치가 꾸미로 얹혀 있었는데 때에 따라 동치미에서 통배추김치, 무김치, 오이를 바꿔 가며 쓴다고 합니다. 소·돼지·닭을 삶아서 기름을 걷어내가며 끓인 것을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간장으로 연한 밤색이 나도록 한 육수에 7 대 3 비율로 동치미 국물을 섞어서 만든 국물을 국수가 3분의 2쯤 잠길 정도로 부었습니다. 겨자와 식초가 기본 양념으로 나왔지요.

평양 체류 엿새 동안 먹은 ‘랭면’ 여덟 그릇

먹어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평양랭면을 먹을 때는 꾸미를 가만히 밀어젖히고 국수에 곧바로 식초와 겨자를 양념해서 먹는 게 제격이라 합니다. 겨자나 식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저는 배를 건져 먹고는 와락 국수에 꾸미를 비비듯이 섞어서 국물에 풀어버렸습니다. 입에 들어온 평양랭면의 첫맛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었고,

 
낯선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도 전에 모든 국수가 그렇듯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젓가락에 걸린 국수 가닥을 붙들고 입을 최대한 오무려 빨아들이듯 했는데 그게 냉면을 제대로 먹는 방법이라는 말을 고향이 북쪽인 털털이 형님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물의 온도를 13℃에서 15℃로 한다고 하던가요. 알맞게 시원했고 간도 잘 맞았습니다. 첫 번째 그릇을 먹을 때는 열렬한 탐구심에, 두 번째로 나온 100g짜리 귀여운 놋그릇 냉면을 먹을 때는 마침내 우리 냉면, 그 시원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은 것 같다는 흔연함에 목젖이 다 떨려왔습니다.

동지들, 우리들이 동의한 바대로라면 서울에는 을밀대·우래옥·을지면옥·필동면옥·평양면옥·함흥면옥이 있지 않습니까. 지방의 명가들은 일단 빼고 말입니다. 그런데 평양랭면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평양냉면의 환상을 먹어온 것일까요?

이튿날 점심 때 폭염 속에 시내를 돌아다닌 끝에 드디어 옥류관에 갔습니다. 옥류관은 사진으로 많이 보셨겠지만 콘크리트로 지은 기와집 모양의 큰 건축물입니다.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가던 저는 복도에서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병원에서 식사를 나를 때 쓰는 것 같은 수레에 수백의 놋그릇에 담긴 냉면이 운반되고 있었습니다.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은 역시 분홍색 한복을 입은 여종업원이었고 놀란 제가 그 앞에 멈춰 서자 미소를 짓더군요. 저는 그만 목이 메어버렸습니다. 여종업원이 아름다워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무더위 속에 길가에 앉거나 서거나 하며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던 평양 시민들 생각이 나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수레를 본 것으로 옥류관의 냉면은 이미 먹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아한 종업원이 한복 자락 휘날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류관 냉면의 맛을 물으신다면 고려호텔 냉면의 맛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국물은 약간 심심한 듯하기도 하고 양이 다소 적기도 한데, 그 국물을 다 마신다고 생각하면 염분의 양은 결코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국물이 모자라다고 신호하면 그 우아한 종업원들이 한복 자락을 휘날리며 주전자를 들고 달려옵니다. 한꺼번에 400g을 주문하면 쟁반처럼 굽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려호텔의 냉면이 더 맛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 다음에 먹었던 민족식당의 냉면이 매콤한 게 입맛에 맞는다고도 했습니다.

남쪽으로 돌아와서 저는 며칠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름 없는 냉면을 먹었습니다. 집 근처의 분식집에서도 먹고 시장에서도 먹고 북의 냉면 계보에는 보이지 않는 비빔냉면도 먹었습니다. 심지어 옥류관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냉면 전문점에 가서도 먹어보았습니다. 평양랭면과 같은 냉면은 없었습니다. 그 냉면은 그 나름대로의 냉면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같을 이유가 전혀 없군요. 그게 우리들의 가치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조가 있고 본산이 있어 그것을 존경하긴 해도 우리는 우리끼리 맛있는 것을 찾고 만들어서 먹는 쪽이지요. 중앙집권적인 체제 안에 살며 주어지는 대로 평양랭면을 먹는 사람들은 우리와 견해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서로 다른 거지, 누가 틀린 건 아니겠지요? 통일은 좋지만 자기 좋은 걸 일방적으로 버리거나 버리게 하거나, 한쪽의 것으로 다른 것을 억압하고 깔보는 건 나쁜 거겠지요? 냉면에도, 랭면에도 삼라만상을 부드럽게 화육하는 순리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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