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뜻을 아세요?"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5.08.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홀로 질주'에 지지층, 여당 모두 흔들...PK 대망론 등 설만 무성

 
“지금은 열 사람의 한 걸음보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국정원의 불법 도·감청, 과거사 청산 같은 굵직굵직한 정치 화두들을 쏟아내느냐는 질문에 한 청와대 참모는 이렇게 답했다. 언뜻 1980년대 운동권의 ‘선도투’를 연상케 하는 이 말은 노무현 대통령이 실제로 요즘 자신을 고독한 선각자로 여기고 있다는 해설로 이어졌다.

“민주화운동도 처음부터 많은 국민이 동참했던 건 아니다. 명분은 옳다고 하면서도 학생들이 화염병 던지고 교통 막히면 쯧쯧거리며 불편해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공감대가 점점 확산되어 6·10 항쟁이라는 엄청난 역사가 탄생했듯이, 노대통령의 진정성도 머지않아 제 평가를 받으리라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다.”

청와대 참모진에 따르면 최근 노대통령의 정치 드라이브는 뚜렷한 목표와 자기 확신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대연정과 지역구도 극복, 개헌으로 이어지는 정치 일정은 이미 대통령 당선 직후 노대통령이 천명했던 과제다. 노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2002년 12월26일 양평에서 열린 민주당 당직자 연수회에서 “17대 총선을 기준으로 임기를 1, 2기로 나누어, 1기에서는 개혁 대통령과 안정 내각을 통해 순수 대통령제에 가까운 제도를 운영한 뒤, 2기에는 내각제에 준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운영하겠다”라고 말했다. “각 당이 정비되고 나면 지역구도를 극복하기 위한 선거제도로 중·대 선거구제 채택 협상을 정치권에 제안하고 싶다” “지역구도를 깨주면 대통령 권한도 양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그때부터 나왔다. 청와대 한 고위 인사는 “노대통령은 지역구도 극복과 권력 구조 개편을 임기 후반기 핵심 과제로 일찌감치 설정했고, 그것이 본인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이 언론사 편집국장과의 간담회에서 “경제 잘하라고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건 아니지 않느냐”라고 다소 극단적인 표현을 썼던 것도 이런 맥락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여론이 뭐라고 하든 노대통령은 끊임없이 자기 목표를 추구하리라는 것이 참모들의 전언이다. ‘지금이 때가 아니지 않으냐’는 비판에는 ‘임기가 한정되어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임기는 정해져 있는데, 국민 여론이 성숙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내 길이 옳다’는 대통령의 자기 확신이 강하게 담겨 있다. 종로 지역구를 뒤로 하고 부산에 출마한 것, 민주당 후보 시절 끊임없이 뺄셈 정치를 한 것, 재신임까지 걸고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강행한 것 등이 처음에는 다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결국 대통령 당선, 탄핵 반대 운동, 총선 승리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일종의 ‘성공 신드롬’에 빠져 있는 것이다.

 
강한 자기 확신은 자연스레 ‘자신을 몰라주는 정치권과 국민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노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유난히 정치권의 결단을 강조했다. 정치권이 기득권에 젖어 있으니,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한 측근은 노대통령이 부쩍 정치권의 무사안일을 개탄하는 말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노대통령이 정치권을 파트너로 생각하기보다 개혁 대상으로 여기는 인상을 주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읽힌다. 노대통령은 언론과 국민에게도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지난 8월18일 언론사 정치부장들과의 간담회에서 “내가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내가 제기한 문제도 중요한 것이다. 결단은 함부로 안 하지 않느냐. 이거 좀 귀담아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한 것도 하소연이라기보다는 원망에 가깝다. 아니나 다를까 노대통령은 “다시한번 연정에 대한 정치협상을 제기하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노대통령의 ‘나홀로 질주’가 급속한 지지층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국민 지지도가 곤두박질하고 있다는 점은 둘째치고, 무엇보다 대통령의 목표를 뒷받침해야 할 여당이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는 양상이다.

‘설 훈을 보면 노대통령이 읽힌다’ 분석도

요즘 여당 의원 사이에서는 ‘대통령의 뜻을 아세요?’라는 말이 유행이다. 만나면 서로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연정을 하겠다는 진의가 무엇인지’ ‘국가 권력이 자행한 범죄의 공소 시효를 배제하겠다는 것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것인지’ 등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아무도 그 뜻을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은 없어서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최근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유인태 의원에게 “수석님한테는 대통령이 이런저런 상의를 좀 하시나요?”라고 물었다가, “지난해 어린이날 이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다”라는 허탈한 대답만 들었다. 정무수석을 지낸 여당 중진까지도 청와대 사정에 깜깜할 정도로 청와대와 여당 사이에 정보가 차단되어 있다는 얘기다.

정보가 없다 보니 대통령이 굵직한 이슈를 던질 때마다 열린우리당은 허둥대기 일쑤다. 한 예로, 노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해석해서 입장을 내놓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갈수록 불만의 강도가 높아가고 있다. 한 재선 의원은 “당이 완전히 들러리로 전락했다. 선거구제 개편이니 과거사법 보완이니 모두 입법으로 뒷받침해야 할 판인데,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당을 무시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뒷수습에 바쁜 지도부도 겉으로 표현은 못하지만 곤혹스런 기색이 역력하다. 한 고위 당직자는 “무슨 ‘날’이 돌아올까 걱정이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대통령이 또 어떤 화두로 당을 혼란스럽게 할지 걱정이 앞선다는 의미다.

대통령에 대한 불만과 무시를 떠나, 일각에서는 ‘PK 대망론’이라는 음모론까지 힘을 얻어가고 있다. 영남 낙선 인사 중용-선거구제 개편을 통한 영남 의석 확보- 권력분점형 개헌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노대통령이 영남권 공략, 특히 부산·경남권 장악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한 여권 인사는 “YS 이후 PK지역은 무주공산이다. 노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지만, 주변의 PK세력들은 노대통령 이후를 위해서라도 확실한 지분 확보에 들어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부산·경남 인맥의 청와대 포진, 대연정 제안을 통한 한나라당 내부 흔들기, DJ 정부의 불법 도·감청 발표를 통한 DJ와의 차별화 등이 다 하나의 흐름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쪽에서는 노대통령이 최근 정수장학회 문제에 집착하는 것도 부산 정서를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같은 맥락에서 ‘설 훈을 보면 노대통령이 읽힌다’는 분석도 나온다. 설 훈 전의원은 지난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측의 최규선 20만 달러 수수설’을 제기했다가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10년간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정가에서는 이번에 그가 사면될 것으로 믿었다. 돈을 받은 것도 아니고, 노대통령 당선을 위해 저격수 역할을 하다가 사법 처리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여권 중진들의 막후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외되자 ‘동교동과의 단절’ ‘한나라당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에 대해 청와대측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퇴임하면 끝인 노대통령이 무슨 욕심을 부리겠느냐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여권의 반발 강도가 거세지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최근 들어 여당 의원들을 몇 명씩 묶어 노대통령과의 면담을 추진하는 눈치다. 김우식 비서실장을 교체하고 정무형 비서실장을 기용하려는 것도 가능하면 대통령·정치권·국민 사이에 생긴 간극을 빠른 시일에 메워보자는 의미라고 한다.

하지만, ‘같이 가자’는 여론에, 노대통령이 끝내 ‘따라 오라’는 입장을 고수할 경우 엇박자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