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에 재벌2세가 바글바글한 이유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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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드라마는 ‘재벌놀이’에 여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 중에서는 <패션70> <루루공주> <사랑찬가>정도가 재벌2세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불새> <황태자의 첫사랑> <온리 유> <파리의 연인>을 비롯해서 얼마 전 화제를 일으켰던 <내 이름은 김삼순>도 재벌2세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신분상승의 욕구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드라마에 재벌2세가 많지 않았습니다. 재벌2세보다 오히려 샐러리맨 이야기를 담은 것이 많았습니다. 세상이 바뀌면 드라마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업 드라마는 <야망의 세월><TV손자병법><토마토><미스터 큐> 등 샐러리맨 신화를 담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와 더불어 샐러리맨 신화가 깨지면서 이후 기업 드라마는 재벌 신화를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비정규직 이야기를 다룬 <신입사원>같은 드라마가 있기는 했지만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재벌2세가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것일까요? 재벌2세는 ‘백마탄 왕자’의 현대적인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경기가 불황인 상황에서 여성들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이런 ‘재벌2세 판타지’ 드라마가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평생직장 신화가 붕괴된 상황에서 여성들에게 샐러리맨 신화는 더 이상 매력이 없는 것이죠. 예전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당신도 전문경영인이 될 수 있다’라고 설득하는 내용이었는데, 요즘 드라마는 ‘당신도 재벌과 결혼할 수 있다’라고 현혹하는 내용입니다. 

재벌2세가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갈등구도를 그리기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드라마로 제작될 경우, 선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결혼을 다루거나 이혼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요소로 집안의 반대가 필수불가결하게 등장하는데, 그 장치로 재벌이 이용됩니다. 집안의 차이가 현격하게 나는 재벌가일 때 집안의 결혼 반대가 더 설득력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재벌이야기를 다뤄도 창업주보다는 재벌2세를 많이 다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텔레비전 드라마는 재벌 신화 중에서도 창업 신화보다 수성 신화를 더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삼성가와 현대가의 창업신화를 다룬 <영웅시대>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재벌2세가 주인공입니다. 기업을 세우느라 곁눈질할 겨를이 없는 창업주보다 풍요하게 자라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벌 2세 이야기가 훨씬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재벌 2세를 소재로 하면 고가 상품의 PPL에 유리하기 때문에도 재벌2세 이야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재벌2세 드라마는 두 가지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재벌2세가 평범한 여성을 만나 사랑을 이룩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영권을 지키고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랑이야기로 젊은 시청자와 여성시청자를 붙들고 경영권 다툼과 같은 파워 게임을 통해 나이 든 시청자와 남성 시청자를 붙듭니다. 경영권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은 궁중 암투처럼 그려지는데, 일종의 변형된 사극 같은 느낌을 줍니다.

시청자들은 재벌을 일종의 ‘현대의 귀족’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세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재벌드라마는 아니지만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을 다루는 드라마도 많이 있습니다. 재벌이 귀족이라면 이들은 아마 기사들쯤 되겠죠. <봄날> <굳세어라 금순아>에는 의사가 <러브스토리 인 하바드> <변호사들>에서는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재벌2세 드라마에는 어떤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업의 흥망성쇠와 관련해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수성이 더 쉽게 그려집니다. 재벌 2세가 나오는 드라마는 주로 '수성 신화'를 그리는데, 일정한 공식을 따릅니다. 그 공식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젊은 후계자가 있다. 그러나 그는 창업주의 독선에 반발해 세상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갖고 보헤미안적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회사의 갑작스런 위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경영을 맡게 된다. 여기서가 중요합니다. 갑자기 숨은 재능을 발휘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것이 기본적인 구성입니다.

이 과정에서 평범한 여성을 만나는데, 이 여성은 헌신적인 사랑으로 재벌2세의 삐딱한 시선을 반듯하게 바꿔줍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파리의 연인>이나 <오 필승 봉순영> 등 재벌 2세가 나오는 트렌디드라마가 따른 공식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재벌의 위치가 독특한데, 재벌드라마에서는 재벌을 어떻게 할까요? 재벌드라마의 일반적인 이야기구조를 설명 드렸는데, 재벌드라마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바로 혈통주의입니다. 재벌2세는 모차르트고 샐러리맨은 살리에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천재와 수재의 대립구도로 몰고 가서 재벌2세의 세습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요즘 <패션 70s>이라는 드라마가 인기인데 이 드라마에서도 부잣집 딸 더미는 타고난 디자이너로, 가난한 집 딸 준희는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디자이너로 묘사됩니다. 대부분의 재벌2세 드라마가 이런 패턴입니다. 

재벌 2세 위주로 그려지는 트렌디 드라마에서 유탄을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전문경영인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샐러리맨 신화를 그릴 때 악역은 재벌2세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역할은 전문경영인에게 돌려졌습니다. 재벌2세 드라마에서 전문경영인은 ‘창업자가 피와 땀으로 일궈낸 기업을 날로 먹으려는 악한’으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철저하게 혈통주의를 따르는 이런 재벌2세 드라마는 몸속에 뭔가 다른 유전자가 있는 창업주의 자식에게 기업이 승계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왠지 현실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재벌의 나쁜 점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없을까요? 전문경영인과 함께 재벌드라마에 악역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재벌의 후처입니다. 이들이 악역을 도맡습니다.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서도 이들이 난 서자가 악역으로 그려집니다. 이 것 역시 혈통주의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후처들은 미모를 무기로 재벌회장에게 접근한 사악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특히 고상하고 우아한 척 하지만 알고 보면 무식한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루루공주>에서도 보면 루루공주의 새어머니가 이런 악역으로 등장하는데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자선파티를 여는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 경제의 파이를 키워야 한다’고 말할 때 파이를 진짜 파이로 알고 ‘왜 우리집 파이가 작나요?’라고 말하고 ‘제로 섬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로섬이 어느섬이냐고 묻는 등 무식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처럼 재벌드라마에서는 재벌이 아닌 재벌에 빌붙은 사람을 악역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의 유일하게 재벌을 비꼰 드라마가 있었는데, 시트콤이었습니다. <귀엽거나 미치거나>라는 시트콤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재벌을 비꼬았습니다. 재벌회장이 TV를 보다가 갑자기 ‘쟤 좀 데려와 봐라’ 그러면 비서들이 그날로 바로 그 사람들을 회장 앞에 대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재벌의 행태를 그렸습니다. 

요즘 재벌드라마는 현실의 재벌을 반영하기 위해  다양한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루루공주>를 보면 고씨 가문과 김씨 가문이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는 드라마 속 KU그룹은 지금은 분리되었지만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이 공동으로 경영했던 LG그룹을 연상시킵니다. 또 남편의 기업을 이어받아 리조트 개발 회사를 운영하는 장여사(윤소정 분)는 현대아산그룹 현정은 회장을 연상시킵니다.

재벌들의 혼인과 관련해 요즘 나타나는 흥미로운 현상은 재벌은 재벌들끼리만 결혼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정관계 인물과 사돈을 맺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정치권력 같은 것은 힘도 예전같지 않고 시한부 권력이라 나중에 오히려 짐만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제는 재벌들끼리 결혼을 많이합니다. 심지어 리이벌 기업끼리도 결혼을 하는데, <루루공주>에서 라이벌기업의 2세인 정준호와 김정은이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만나는 모습은 재벌의 이런 혼인풍토를 연상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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