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판타지 한류 계승자 될까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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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 배경 <태왕사신기> <무영검> 등 속속 제작

 
판타지는 새천년 들어 최고의 흥행 코드로 떠오르고 있는 대중 문화 코드이다. 책으로도 크게 인기를 모은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는 영화로 제작되어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다.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역시 영화로 제작되어 큰 수익을 거두며 판타지를 새로운 블록버스터 코드로 자리 잡게 했다. 

무협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판타지 역시 전세계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무협 소설로 발원해 홍콩 무협 영화로 전성기를 이룬 무협 판타지는 더욱 기발해진 상상력으로 무장해 할리우드 영화의 새로운 코드로 자리 잡았다.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으로 시작된 무협 판타지 신드롬을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 첸 카이거 감독의 <무극>, 쉬커 감독의 <칠검>이 뒤를 잇고 있다.  

<센과 치히로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제작하는 영화마다 천만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일본 특유의 판타지 애니메이션을 개척했다. 재패니메이션의 판타지 코드 역시  전세계인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다.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나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도 SF 판타지로 할리우드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한국형 판타지는 아직 걸음마 단계

한국에서도 판타지는 어느 정도 검증된 흥행 코드이다. 이우혁의 <퇴마록>이나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와 같은 판타지 소설, <리니지> <라그나로크> 등의 판타지 게임, <바람의 나라> <불의 검> 등의 판타지 만화는  이미 신세대 문화의 중요한 코드로 자리 잡았다. 중국 무협 판타지나 일본 판타지 애니메이션과의 차이는 이런 판타지 코드가 주류 장르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전세대로 확장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형 판타지는 영화와 드라마 등 주류 대중 문화 장르에 여러 차례 진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영화에서는 <은행나무 침대>만이 흥행에 성공했고 <퇴마록> <비천무> <단적비연수> <자귀모> 등 판타지 영화들인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구미호외전> <환생-Next> 등의 판타지 드라마가 몇번 시도되었지만 시청자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한국형 판타지가 주류 장르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판타지 소설 작가 이우혁씨는 “판타지의 미덕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영화 감독이나 드라마 PD는 판타지를 단지 흥미로운 소재로만 본다. 그러나 판타지는 사상을 갖춘 상상력의 체계다. 그런데 이를 무시한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같은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이 그 상상력 체계를 구현하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한국 대중문화는 리얼리즘 일변도

한국형 판타지가 성공하지 못했던 데에는 시장의 규모가 작았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판타지 영화나 드라마에는 특수효과와 CG에 많은 자본이 필요하지만 한국의 영화 시장이나 드라마 시장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표현에 제한이 없는 소설이나 만화는 이런 한계가 없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 게임의 경우는 시장이 커서 사용자들이 원하는 수준의 비주얼을 구현해낼 정도의 투자가 가능했다.

가파른 현대사도 판타지적 상상력을 막았다. 식민과 전쟁, 빈곤과 독재 등 현대사의 진행을 겪으면서 한국 문학, 그리고 한국의 대중 문화는 오랫동안 ‘리얼리즘의 주술’에 빠져 있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영화 속에서 리얼리즘이 큰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대중 문화에서 ‘현실성이 없다’는 말은 ‘작품성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게 쓰였다.

그러나 조금씩 판타지가 숨통을 트고 있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말아톤><친절한 금자씨><웰컴 투 동막골> 등 올해 흥행한 영화들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영화에 판타지적 장면이 감초처럼 쓰였다는 것이다. 이런 판타지적 장면은 관객이 주제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산뜻한 느낌을 맛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성공은 판타지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주었다.

신세대는 상고사 판타지 선호

특히 ‘월드컵 4강’ ‘한류’ ‘삼성전자 성장 신화’ ‘황우석의 배아 복제’ 등 판타지적 경험을 한 신세대가 판타지 코드를 부활시키고 있다. 이들이 부활시키고 있는 것은 주로 역사 판타지다. 기성 세대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와는 다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고조선과 고구려와 발해를 잇는 우리의 상고사에 대해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상상력은 압록강과 만주를 넘어서 아무르 강 유역에까지 이른다.

 
판타지에 대한 신세대의 감수성은 다소 국수주의적이고 선민의식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데, 역사 판타지의 대표적인 코드는 바로 중국과의 경쟁이다. 중국과의 경쟁을 중심으로 발해와 고구려·고조선은 물론 고조선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 이들이 찾은 신화의 영웅은 바로 치우천왕이다. 중원을 장악하고 모든 민족을 복속시키려했던 황제의 패권주의에 대항해 각 민족을 결속해 황제와 맞선 영웅 신화를 가지고 있는 치우천왕을 이들은 최고의 영웅으로 치켜세운다. 치우천왕은 월드컵 응원단인 붉은악마 깃발의 모델이기도 하다. 

판타지 뮤지컬 <불의 검>을 제작하는 코코줌엔터테인먼트 정진욱 대표는 북방 민족의 정통성을 잇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피포터> 시리즈도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켈트족과 게르만족을 비롯한 북유럽 신화와 영웅 서사시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동양에서는 이 역할을 한국이 할 수 있다. 선비 몽골 거란 말갈 여진 등 중원을 호령했던 북방 민족은 대부분 망하고 이제 한국만이 저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판타지가 다시 떠오르자 대중 문화 장르에서도 판타지 프로젝트가 재가동되고 있다. 판타지 부활의 기수는 <비천무>를 연출했던 김영준 감독이다. <반지의 제왕> 제작사인 뉴라인시네마의 투자를 받은 그는 한국형 무협 판타지 <무영검>을 제작하고 있다. <무영검>은 역사 판타지의 끝자락인 발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발해의 마지막 왕자를 지키는 무사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얼개다. 

<태왕사신기> 계기로 판타지 장르 커질 듯

판타지 부활과 관련해 가장 관심을 모으는 프로젝트는 드라마 <태왕사신기>다. 내년 가을 방영되는 <태왕사신기>는 한국적 판타지의 대중화와 세계화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명의 눈동자><모래시계>의 명콤비인 김종학PD와 송지나 작가가 다시 뭉치고 한류 스타 배용준이 출연하는 이 드라마는 이미 아시아를 넘어선 세계 규모의 프로젝트로 진행되고 있다. 

 
24부작으로 제작되는 <태왕사신기>에는 100억원 규모의 세트를 비롯해 2백50억원 정도의 제작 예산이 투여된다. 이미 일본 등 해외에 판권을 판매 중인 이 드라마는 세계적인 배급사를 통해 97개국 정도에 방영될 예정이다. 드라마 투자와 배급 마케팅을 대행하고 있는 SSD사 김의준 대표는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도록 <반지의 제왕> 특수효과팀을 이끌었던 브리짓 버크와 영화 음악의 거장 히사이시 조를 데려왔다. 모두가 성공을 낙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제작진이 <태왕사신기> 제작에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은 민족우월주의나 선민의식을 벗어나 국제적인 주제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대표는 “중국에 대항해 고유의 영역을 지키려고 연합전선을 펴는 모습은 현대의 상황과도 비추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를 통해 중국 주도의 아시아 질서 재편이나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재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판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제작자들은 판타지가 한류의 대박 코드가 될 것이라고 모두들 장담한다. 중국 무협 판타지와 일본 판타지애니메이션과 다르고 우리만이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의 검>을 제작하는 정진욱씨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고 싶다. 그러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꿈을 갖는 것은 좋은 것 아닌가? 우리 조상들은 뛰어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땅은 되찾을 수 없지만 정신은 되찾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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