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살인범도 두 달만 버티면 된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5.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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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형법 공소시효, 선진국 절반 수준

 
피살자는 열세 살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0년 11월15일, 경기도 화성 안용중학교 1학년 김미정양은 청소 당번이어서 친구들보다 늦게 하교했다. 4km 떨어진 집으로 가기 위해 원바리 고개를 넘었을 때 주변은 안개가 자욱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의 삼촌은 병점5리 인근 야산에서 교복과 볏가리에 덮인 채 싸늘히 누워 있는 김양을 발견했다. 팔다리가 스타킹으로 묶여 있고 몸이 구부러져 있었다. 입은 브래지어 재갈로 막혀 있었다. 음부 주위는 상처로 가득했다. 범인은 소녀를 강간한 뒤 질내에 도시락용 포크 수저와 볼펜을 집어넣었다. 가슴에 칼자국이 열아홉 군데였다. 이것이 화성 연쇄살인사건 제9차 사건이다(<시사저널> 제707호 참조)

 
1986년부터 1991년 4월까지 화성 인근에서 여성 10명이 피살되었다. 그 중 9차 사건은 피해자 나이가 제일 어렸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본 관객들은 김미정양의 죽음을 묘사한 장면에서 가장 많이 울었다. DNA 분석 결과 9차 사건 범인과 10차 사건 범인은 다른 사람이었다. 어쩌면 김미정양 사건이 화성 연쇄살인 진범의 마지막 범행인지도 모른다. 이 사건 공소시효가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20년 전 화성 사건을 직접 수사했고, 이후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는 책을 펴내기도 한 하승균 경기경찰청 형사과 수사지도관(58)은 “화성 연쇄살인 같은 극악한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15년은 너무 짧다. 공소시효가 끝나도 나는 범인을 계속 추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30년 4개월 만에 살인범 검거

요즘 공소시효라는 낱말이 정치권의 화제다. 8월15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공권력에 의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를 언급했고 한나라당은 위헌이라고 반발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 자체에 대해 여론 추이는 엇갈린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우리 나라 형법의 공소시효가 외국에 비해 짧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오호택 교수(한경대·법학)는 “우리의 공소시효는 체계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짧다”라고 지적한다.

현재 우리 나라 공소시효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는 15년, 무기징역에는 10년, 10년 이상 징역에는 7년으로 정해져 있다(아래 표 참조). 하지만 미국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연방법에서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있다. 사형의 존재 여부는 각 주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살인에 대해서만은 공통적으로 공소시효가 없다. 때문에 사건 발생 수십 년이 지나서 살인범을 검거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1974년 10월 미국 잭슨빌에서 당시 열여섯 살이던 앨버트 홀랜드(33쪽 아래 사진)가 밤거리를 거닐다가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30년 4개월이 지난 2005년 2월22일 앨버트의 친구였던 앤서니 월리엄스(49)가 경찰서를 찾아와 코카인 중독을 치료해 달라고 호소하면서 과거 범행을 자백했다. 한국이었다면 기소할 수 없었겠지만 월리엄스는 지금 재판을 받고 있다.

우리 공소시효가 외국보다 짧다는 것이 우리가 더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거나, 관용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 매사추세츠 주는 인권을 고려해 사형제도를 두지 않고 있지만, 살인 사건에 공소시효는 무기한이다. 역시 사형제도가 없는 독일의 경우에도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30년이다. 독일의 형법 공소시효는 대체로 우리의 2~3배에 이른다.

우리 나라 형법은 광복 이후 일본 법률을 참고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글자 구문과 조문 번호까지 일본 형법과 유사하다. 하지만 정작 일본 참의원은 2004년 12월1일 형사소송법의 공소시효를 대폭 늘리는 법안을 가결했다. 예를 들어 사형 해당 범죄의 공소시효가 15년에서 25년으로 늘어났다. 100년 만의 개정이었다. 독일이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한 것은 1969년이었다.

 
나아가, 독일과 미국은 미성년자 성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정지시키고 있다. 독일은 형법 제176조에서 강간·추행죄의 경우 피해자가 만 18세에 달할 때까지 공소시효 진행이 정지된다고 규정한다. 미국 연방법은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가 25세가 될 때까지 공소시효를 정지시키고 있다.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 살고 있는 정소정씨(가명·31)의 사례는 미성년자 성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문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정씨가 처음 ‘몹쓸 일’을 당했던 때는 열두 살이었던 1987년이었다. 가해자는 아주 가까운 친족이었고 시련은 열다섯 살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족을 고발하기에는 정씨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그녀는 과거를 잊으려고 애썼다.

올해 30대가 되어 정씨는 집을 나와 독립하게 되었다. 뉴스에 등장한 몇몇 사건들을 보며 자신도 가해자를 고발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녀는 가족에게 숨겨두었던 비밀을 털어놓고 고소를 준비했다. 하지만 친족 성폭력에 대한 공소시효가 7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간신히 마음을 열고 치유를 위한 걸음을 내딛었는데 좌절하고 만 것이다. 한국 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어린이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서야 피해를 깨닫고 후유증을 겪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한다.

가을 국회 때 공소시효 연장 법안 논의할 듯

최근 국회에서 형법 공소시효를 연장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열린우리당 문병호 의원 등 10명은 8월17일 공소시효 연장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현재 15년으로 되어 있는 사형 공소시효를 20년으로, 10년으로 되어있는 무기징역 범죄를 15년으로 늘리는 등 전체적으로 5~2년 가량 늘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의원은 “공소시효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증거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화 시대이고  DNA 분석 등 과학 수사 기법도 발달해 과거와는 사정이 다르다”라고 말했다.

공소시효가 늘어나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어떻게 될까? 과거 발생한 사건의 공소시효를 소급해 적용할 수 있는지는 법학계의 뜨거운 논쟁점이다. 정진연 교수(숭실대·법학)는 “이미 공소시효가 완성된 범죄를 다시 시효를 연장해 기소할 수는 없지만(진정소급불가), 아직 시효가 남은 사건의 경우 입법을 통해 시효를 늘릴 수 있다(부진정 소급 가능)고 본다”라고 말했다. 만약 다수설대로라면 화성 연쇄살인의 경우 9차·10차 사건에 대해서 공소시효가 5년 이상 연장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화성 살인사건 범인이라면 몇 달만 버티면 안심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직 이르다. 9차 사건 범인의 혈액형은 B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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