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에 부는 '다시 보자 우리 역사' 열풍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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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대중문화계에 ‘다시 보자, 우리 역사’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 역사에서 대중적인 흥행코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대장금><다모><해신>과 같은 드라마, 그리고 <그때 그 사람들><혈의 누><웰컴 투 동막골>과 같은 영화, 그리고 <불의 검>같은 뮤지컬 등 각 대중문화 장르에 우리 역사를 재해석하는 작업이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 재해석 컨텐츠는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하고 있는데, 대략 세 묶음 정도로 경향이 나뉩니다.

일단 개화에서 밀레니엄까지 근현대사를 다루는 작품이 한 묶음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조선 중후기를 배경으로 한 묶음, 그리고 우리 상고사를 배경으로 한 묶음이 있습니다. 이런 역사물은 시대배경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조금 나뉘는데요, 굴곡진 우리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다분히 리얼리즘 미학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 중후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미시사적인 관점에서 역사에 돋보기를 들이대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상고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판타지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상고사, 조선시대 중후기, 근현대사 배경으로 한 작품 많아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으로는 <영웅시대>나 <제5공화국>같은 드라마가 있기는 하지만, 영화계에서 특히 활발합니다. 가히 영화를 통해서 현대사를 다시 쓴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영화가 제작 중입니다. 최근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웰컴 투 동막골>을 비롯해, 10·26 사건을 다룬 <그때 그 사람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삶을 다룬 <도마 안중근>은 이미 개봉이 되었습니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을 다룬 영화(정지영 감독, 명필름 제작)를 비롯해 언론 통폐합, 5·18광주민중항쟁, 인민혁명당재건위(인혁당) 사건(박찬욱 감독, 모호필름 제작), 노근리 학살(황규덕 감독, 명필름 제작) 등 <이제는 말할 수 있다>나 같은 현대사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소재들이 줄줄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이런 작품에서 과거사는 작품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옮겨가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과거사 문제를 ‘직접화법’이 아닌 ‘간접 화법’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류인생> <효자동 이발사> <말죽거리 잔혹사> 등은 유신 독재 시절의 폭압적인 분위기를 영화의 원경에 배치했습니다. <살인의 추억> 역시 군부 독재 시절의 우울한 분위기를 배경에 깔았습니다.

굴곡진 현대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 제작 줄 이어

과거사는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어 공포 영화에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인형사>(일제 강점기) <분신사바>(박정희 정권) <알 포인트>(베트남 전쟁) 등이 시대적 배경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제작된 작품들, 그리고 앞으로 제작될 작품들은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우리 현대사를 정조준하는 작품들입니다.

특히 박찬욱 감독의 인혁당 사건을 재조명 영화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박찬욱 감독에게, 어떤 식으로 그려내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상업적으로 만들겠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내가 어떤 예술적 성취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은 철저하게 관심 밖이다. 만들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타 캐스팅을 하겠다.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보게 해서 관객들이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알고 한번 되새겨 보도록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이 말이 386세대 감독들이 근현대사 영화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근현대사 작품은 이정도로 하고, 조선시대 작품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로 조선 중후기를 다룬 작품이 많이 제작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일단 제작된 작품 중에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와 <혈의 누>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중후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 미시사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왕조 개창기의 억조창생의 위업을 다루거나, 구국영웅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풍속사나 생활사적인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왕의 남자>라는 영화도 제작 중인데, 이 영화 역시 왕권에 대한 갈등보다는 조선시대 궁중 광대를 통해 왕의 인간적인 고뇌를 다루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조선시대 수사물이 강세인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유산이 드라마 장르 다양화에 기여

수사물 중에서 <다모>와 <혈의 누>는 이미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앞으로도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이라는 조선시대 과학수사반을 다룬 시리즈 드라마와 여형사 다모를 소재로 한 <형사, 듀얼리스트>라는 영화가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런 수사물 관련해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수사물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원 힘은 우리 조상들의 기록정신 덕이라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기록정신 덕이라니, 무슨 얘기냐고요? 몇 년 전에 서울대 규장각 서고에서 흥미로운 자료가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살인 사건기록인데요, 무려 5백50여건의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자료가 발견되었습니다. 한 연구원이 우연히 발견한 이 자료를 한 벤처기업가가 디지털컨텐츠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이 자료에 집착했던 이유는 사건기록이 너무나 구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사 방식이나 부검 방식이 상당히 과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컨텐츠진흥원의 도움으로 이들은 이 자료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것은 물론, 간단한 형태의 시놉시스로 만들어 두었는데, <다모>와 <혈의 누>가 히트하자, 드라마제작자들이 이 자료로 드라마를 만들겠다고 덤비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 상고사는 판타지적 상상력의 보고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의 명콤비인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다시 뭉쳐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태왕사신기>는 신화적인 판타지 작품입니다. <비천무>의 김영준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무영검>은 무협 판타지입니다. 뮤지컬 <불의 검>은 고조선 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판타지 멜로물입니다. 

판타지는 검증된 흥행 코드

판타지 작품이 연 이어 출몰하는 것은 판타지가 어느 정도 검증된 흥행 코드이기 때문입니다. 이우혁의 <퇴마록>이나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와 같은 판타지 소설, <리니지> <라그나로크> 등의 판타지 게임, <바람의 나라> <불의 검> 등의 판타지 만화는 이미 신세대들의 중요한 문화코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만 중국 무협 판타지나 일본 판타지 애니메이션과의 차이가 있다면 이런 판타지 코드가 주류 장르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전세대로 확장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한국형 판타지가 주류 장르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전세대로 확장되지 못하는 이유는  시장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판타지 영화나 드라마에는 특수효과와 CG에 많은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영화 시장이나 드라마 시장은 이를 구현해줄만한 시장규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다른 이유로는 판타지를 받아들일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IMF 이후 극심한 불황을 겪으면서 판타지적 상상을 가져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형 판타지가 주류 장르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판타지 소설 작가 이우혁씨는 판타지의 미덕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영화감독이나 드라마 PD는 판타지를 단지 흥미로운 소재로만 본다는 것입니다. 판타지는 일관된 사상을 갖춘 완벽한 상상력의 체계인데 이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같은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이 그 상상력의 체계를 구현하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라고 판타지는 독자들이 상상했던 것을 최대한 보여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주류 장르와 기성세대에는 통하지 않는 판타지가 유독 신세대에게는 통하는 이유는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역사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부활시키고 있는 것은 주로 역사 판타지입니다. 기성세대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와는 다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고조선과 고구려와 발해를 잇는 우리의 상고사에 대해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세대에게 새롭게 재해석 되는 상고사

이들의 상상력은 우리의 영역을 압록강과 만주를 넘어서 아무르 강 유역에까지 이르는 넓은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월드컵 4강’ ‘한류’ ‘삼성전자 성장 신화’ ‘황우석의 배아 복제’ 등 일종의 판타지적 경험을 하면서 신세대는 판타지 코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판타지물들은 다소 민족우월주적이고 국수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세대들이 어설픈 선민의식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판타지가 주류 장르로 진출하면서 그런 성격이 순화되고 있습니다. 요즘 역사 판타지의 대표적인 코드는 바로 중국과의 경쟁입니다. <태왕사신기> 같은 경우도 제작진이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은 민족우월주의나 선민의식을 벗어난 국제적인 주제 의식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중국에 대항해 문화적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다른 북방민족과 연합전선을 펴는 모습을 통해서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재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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