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 않는 ‘대북 소심증’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5.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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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개성 입주 제안받고도 시늉만…“실리 적다” 판단

문:삼성으로 하여금 대북 사업에 뛰어들게 하려면?
답:정부가 이재용씨 수사 얘기를 흘린다.

‘현대 사태’로 인해 답답증이 더해가는 경협 관계자들 사이에 오가는 뼈 있는 농담이다.
남북경협에서 삼성은 늘 구원투수처럼 여겨졌다. 제일모직 생산 라인 하나만 개성에 들어가도 공단 하나가 조성될 것이라는 통일부 고위 당국자의 말 속에 삼성에 대한 기대감과 아쉬움이 묻어난다. 정부는 삼성이 의지만 있다면 개성공단 일부를 내줄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0년 8월 현대의 개성공단 부지가 확정되었을 때 북한이 삼성에도 비슷한 제안을 한 사실이 최근 확인되었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개성 내의 또 다른 지역을 삼성의 전자복합단지 부지로 제공하겠다고 북측이 제안한 바 있다”라고 밝혔다. 당시 언론에서는 현대의 개성공단에 맞서 삼성이 해주에 전자복합단지를 구상하고 있다는 보도가 범람했다. 그러나 “해주는 추측 보도였고, 실은 개성이었다”라고 이 관계자는 밝혔다.

북측의 이같은 제안은 결국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삼성의 전자복합단지 구상은 여론을 의식한 ‘립서비스’였기 때문이다. 북한의 제안이 있은 직후 삼성은 현지 측량 명목으로 시찰단을 개성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이미 ‘(전자복합단지에 대해) 검토는 하되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가 해제된 이후에나 실행에 옮긴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현대가 적극 나서고 당시 김대중 정부의 눈치도 봐야 하는 상황에서 뭔가 움직임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당시 내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의 지적이다. 이마저도 5년 전 얘기다. “지난 5년 간은 그런 애드벌룬조차 찾아볼 수 없다”라고 경협 관계자는 꼬집었다.

물론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은 아니다. 제일모직의 피복 임가공, 베이징을 무대로 한 소프트웨어 남북 공동 개발, 이건희 회장이 IOC 위원인 관계로 IOC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대북 체육지원등이 소규모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북 사업을 총괄하는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 역시 “본격적인 사업은 없다”라고 시인한다. 북한이 아직 생산기지로서의 여건을 갖추지 못한 게 가장 큰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말 속에는 ‘돈 안 되는 사업은 하지 말라’는, 이병철 회장 이래 삼성가의 ‘가훈’이 면면히 흐르는 것 같다. ‘민족’ ‘장기적 안목’ 같은 거창한 명분은 삼성과 생리적으로 안 맞는 것이다.

미국 주도 ‘바세나르 협정’에 발목 잡히기도

주력 업종이 가전·전자·반도체 쪽이라는 점도 현대와는 다른 삼성의 소극적 태도를 규정하는 요인이다. 고 정주영 회장의 금강산 사업은 북한 사회간접자본 사업을 겨냥한 현대건설의 회생전략적 성격이 강했다. 반면 원천 기술의 대부분을 미국에 빚지고 있는 삼성으로서는 미국이 북한에 쳐놓은 바세나르 협정이라는 수출 통제 체제 앞에서 항상 몸을 움추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외국인 투자자라는 강력한 시어머니가 등장했다. 국내 외국계 증권사의 한 임원은 “외국 자본 처지에서 북한은 투자 부적격 지역이다. 삼성의 대북 투자는 외국 투자자의 저항, 주가 하락, 해외 채권 시장에서 이자율 상승이라는 삼중고에 둘러싸여 있다”라고 말했다. 이학수 부회장 역시 지난해 말 한 기자회견에서 이같은 정황을 실토했다.

결국 북·미 관계 개선으로 미국이 북한에 씌어놓은 경제 제재라는 ‘고깔’을 벗겨주는 등의 근본적인 환경 변화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사회에서 차지하는 거대한 영향력과 걸맞지 않는 삼성의 지나친 ‘대북 소심증’에 대해서는 시선이 곱지 못하다. ‘북한도 이미 기대를 접었다’는 대북 소식통의 지적에서, ‘과연 때가 됐다고 해서 삼성이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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