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살짝 보였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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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 뿌린 ‘실체’ 일부 밝혀져…이건희 회장에게 불똥 튈 가능성 적어

 
“회장님께서 처음에 5억 정도로 하고 본격적으로 경선 선언하고 하면 더 도와드리겠다고 했습니다.”(4월7일자 녹취록)

“회장님께서 몇 가지 방침을 말씀하십디다.(중략) 이회창씨한테 보내는 것은 여러 사람하지 말고 홍사장(홍석현)을 계속 통하라고 하시고.”(10월7일자 녹취록)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나눈 대화라고 알려진 이른바 X파일의 내용이다. 시점은 1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97년. 녹취록에 따르면, ‘회장님’으로 거론되는 이건희 회장은 정치 자금 전달 방법과 액수까지 언급한 것으로 되어있다. 대통령 선거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의심만 했던 삼성이, 실행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실체를 드러냈다.
이는 이건희 회장은 정치 자금과 관련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삼성의 공식적인 해명과 배치된다. 공식적인 해명과 사적인 대화 사이 간격은 크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5백억원대 채권 행방 추적 쉽지 않아

삼성은 다른 대기업들처럼 역대 대통령 선거 때마다 자유롭지 못했다. 삼성은 덩지가 커진 만큼 오히려 건네는 액수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도 가장 많은 뭉칫돈을 건넸다. 이회창 후보 쪽에는 3백40여억원, 노무현 후보 쪽에는 30여억원에 이른다. 물론 검찰이 밝혀낸 액수만 이렇다.

실제로 검찰은 명동 사채 시장을 훑은 끝에 삼성이 8백억원대 국민주택채권을 매입한 것을 확인했다. 바로 이 채권의 일부가 대선 자금으로 흘러갔다. 나머지 5백억원대 채권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이건희 회장의 재산 관리를 맡고 있는 이학수 본부장은 지난해 <신동아> 6월호와 인터뷰하면서 “채권 구입 자금은 100% 이건희 회장 개인 재산이고, 회장 재산을 운용할 목적으로 샀다”라고 말했다. 그는 검찰에서도 “이건희 회장은 워낙 돈이 많아 재산 관리에 신경을 안 쓴다. 이회장 모르게 집행했고 따로 보고도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본부장의 이런 말들은 공식적인 해명에 가깝다. 이는 녹취록에 ‘회장님께서 처음에 5억 정도로 한다’는 것처럼 구체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내용과 배치된다.
검찰은 그의 공식적인 해명을 못 깼는지, 아니면 안 깼는지, 논란만 남긴 채 대선 자금 수사를 끝냈다. 드러나지 않았던 5백억원대 삼성 채권은 내사를 종결했다. 채권을 매입한 실무자들이 모두 해외로 출국해버려, 조사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학수 본부장은 이 사건으로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지난 5월13일 석가탄신일에 사면 복권되었다.
이렇게 해서 2002년 대선 자금 수사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내사 종결되었던 사항이 되살아난 것이다. 지난 5월, 채권 매입에 관여한 실무자인 최 아무개씨가 귀국했다. 이학수 본부장이 사면 복권이 된 직후였다. 지난 9월5일 검찰은 도피하던 그를 체포해 매입 과정과 용처를 추궁했다.

삼성 채권에 대한 검찰의 수사 재개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무자인 최 아무개씨의 상관이자 안희정씨에게 불법 자금을 건넸던 박 아무개 상무가 지난 7월 암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검찰은 난감해졌다. 중간 연결 사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번 X파일의 배경이 된 1997년 대통령 선거 때도 삼성의 보이지 않는 손은 바지런하게 움직였다. 그 해 중앙일보와 대선 주자였던 이인제 후보의 대립은 조선일보-노무현 충돌만큼이나 가팔랐다.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이인제 후보는 중앙일보 보도가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며 비판했다. 선거 막바지에는 이회창 후보 지원 문건이라면서 중앙일보 내부 문건을 이후보측이 폭로해 양쪽 싸움이 법정 공방까지 이어졌다.

“뇌물죄로 처벌 가능하다”

1997년 대선 때 삼성의 행보는 세풍사건 재판에서도 일부 드러났다. 세풍사건 첫 공판에서 이회창씨 동생 이회성씨가 삼성으로부터 60억원을 받았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당시 검찰은 이를 세풍사건과 별개로 보았고, 정치자금법이 시행되기 이전에 받은 점을 들어 추가 기소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검찰은 X파일 내용과 세풍 수사 기록을 정밀 검토해보니, 돈을 전달한 시기·액수·방법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삼성의 기아차 인수 로비와 연결되면서, 정치 자금이 아니라 뇌물로 보면 처벌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검찰 안에서도 퍼지고 있다.

내용에 대한 수사를 꺼리던 검찰도 들여다볼 태세이다. 검찰은 이학수 본부장에 이어 지난 9월6일 김인주 구조본 사장을 불러 X파일 실행 여부를 추궁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이건희 회장에게까지 더 나아갈지는 불투명하다. 2002년 대선 자금의 삼성 채권 관련 수사는 이미 연결 사슬이 사라졌고, 1997년 대선 자금과 관련해서도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자금)수사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수사 때 2백50억원을 건넨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던 이건희 회장이 또다시 불명예를 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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