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를 지킨 사람들 3- 김영환과 장지량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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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
<지관스님 공적비문 중>
경남 합천 해인사 삼선암 입구에는 6.25전쟁 당시 미군의 명령에 불복하면서 팔만대장경을 수호한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가 있다. 지난 2002년 6월17일 세운 것이다.

당시 해인사 주지 세민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불심 깊었던 김영환 장군의 민족문화에 대한 굳은 신념이 없었다면 팔만대장경은 한갓 역사 속에 잿더미로 사라졌을 것"이라며 "김영환 장군의 애국적이고, 문화적인 신념, 보살행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제막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스님은 총무부장 원택스님이 대독한 축사에서 "전쟁의 위급한 상황에서 국가문화유산을 수호한 김영환 장군은 이로 인해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며 "이번에 제막한 공적비를 통해 세계문화유산의 가치와 그 정신이 후손에게 영원히 전해지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또 김영환 장군과 마지막 비행을 함께 했던 김두만 장군(전 공군참모총장)은 "김영환 장군은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역을 수행한 분으로 해인사와 국보인 팔만대장경을 구하기 위해 미군의 폭탄 투하 명령을 어기고 뒷산에 폭탄을 소비하도록 명령했다"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가식과 꾸밈이 없었던 김영환 장군은 수많은 후배들과 공군장병들에게 정신적 좌표가 됐다"고 추모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역대 공군참모총장들을 비롯하여 공군장교출신들의 모임인 보라매회 회원 100여명이 참석하여 김영환 장군의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훌륭한 업적을 기렸다.

김 장군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뒤 전방에서 미처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 1천여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벌이던 1951년 9월, 제1 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아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았으나 문화유산이라는 이유로 명령에 불복,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의 소실을 막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는 한국전 당시 최초의 한국인 전투조종사로서 많은 공을 세워 공군조종사의 상징이 된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1948년 공군창설 7인 간부로서 군에 입대하여 1951년 한국인 최초로 전초기지 사령관을 맡아 단독출격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김장군은 참모처장이며 불자인 장지량 장군 등과 함께 해인사 폭격의 부당성을 보고했다. 이에 대해 미군은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이승만대통령에게 보고, 김영환 장군은 사형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김 장군은 공군 창설의 산파역이었다는 공로가 참작돼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1954년 비행훈련중 강릉상공에서 34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직했다.

1951년, 지리산 지역에서는 북한군 패잔병들이 주축이 된 7천여명의 무장공비들 (일명 남부군)이 후방지역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이에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를 중심으로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공비토벌작전이 시작되었는데, 일선부대와 달리 무장이 빈약했던 경찰부대는 무장공비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토벌작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기습남침이 좌절로 돌아가자 퇴로가 끊긴 북한군 병력 중 많은 수가 지리산에 숨어들었으며 이들은 이미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이었던 '남조선 인민 유격대'(통칭 남부군)와 합류하여 후방을 교란하면서 저항을 계속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거나 협력을 안 하는 주민들을 살해했다.

 
남부군의 끈질긴 저항은 결국 경찰과 국군 토벌대의 무차별적인 포격과 근거지 초토화작전을 불러왔으며, 이 와중에 애꿎은 지리산지역의 선량한 양민들이 무장공비들과 토벌대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반동분자로 몰리거나 빨갱이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수많은 죄 없는 양민이 무장공비들과 토벌대 양측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1951년 여름이 지나면서 지리산일대의 공비를 하루빨리 토벌해 전선 후방을 안정시켜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자 이 작전을 공중지원하기 위해서 한국 공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한국 공군은 독자적인 작전권을 획득하자마자 사천비행장을 근거지로 하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1951년 8월 19일부터 한달 여 기간동안 항공지원을 실시했다.

당시 지리산 일대의 항공지원작전에는 김영환 대령이 지휘하는 한국공군 유일의 전투비행대인 제10 전투비행전대가 맡도록 되어 있었으며, 미 공군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정찰기와 연락장교를 파견해서 한국공군기들이 작전지역 상공에 진입하기 전에 미리 지상의 동향을 살피고 진입하면 공격목표를 지정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작전권을 획득하기는 했으나 사천기지에서 강릉기지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아직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바우트원 대대 소속의 미공군 군사고문단의 도움과 지시를 많이 받고 있었다.)

당시 김장군이 어떻게 팔만대장경을 살렸는지는 1979년 12월에 발간된 공군 퇴역 장교들의 소식지인 <보라매 얼>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전쟁 당시 김영환 대령 휘하에서 작전을 했던 편대원 서상순 중위가 '가야산 해인사 중심의 공비토벌기'라는 수기를 이 책에 썼다. 이 내용은 이후 1989년 <월간항공> 12월호에 게재되었고, 이후 불교 기관지 등에도 '팔만대장경을 수호한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 된 적이 있다.  <보라매 얼>에 실렸던 서상순 중위의 수기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그해 12월 18일 있었던 일이다. 며칠 계속되어 내린 진눈깨비로 공기가 습하고 지리산 높은 골짜기마다 안개구름이 깔렸으나 동쪽 아롱산 능선 사이로 눈부신 아침 해가 밝아와 그 동안 피로를 푼 전투조종사들은 마음대로 푸른 하늘을 날며 종횡무진 곤두박질치며 마음껏 때려 부수고 싶은 감정에 설레었다. 6시 30분 아침식사가 끝났을 때 벌써 작전참모 장지량 중령이 직접 적정을 공중정찰하고 돌아와 '찌르릉' 하고 긴급출동을 알리는 비상벨을 울렸다. 아직까지 전례로 보아 우기에는 아군이 불리하고 맑은 날에는 승전하였으며, 또 야간에는 적이 활기를 띠고 주간에는 아군이 전승하였으니까 말이다.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나에게도 출격명령이 내렸다. 얼마 뒤 우리 편대기들은 낙동강 줄기를 따라 북상하다가 비행지휘관 김영환 대령이 인솔하는 대로 함안 상공에서 기수를 산악지대로 돌려 얼마 안가 협천 상공 8백feet에서 '모스키토'(미 5공군 정찰기명)와 만나라는 무전명령을 받았었다. 우리 4기 편대는 김대령이 1번기, 2번기가 강호륜, 3번기가 박희동, 4번기가 필자 등 강팀이었다. 정찰기의 훈령은 가야산 동남으로 산줄기와 산줄기, 계곡과 계곡 사이로 조그마한 냇물이 흐르는데 그 중 한 능선이 흐르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울창한 산림을 이루어 삼태기 모양의 형국 안에 온화하게 보이는 분지에 소복히 내려다보이는 사찰과 인근의 소굴을 폭격하여 지상군을 지원하는 것이다.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38호기가 정세를 일독하고자 '모스키토'의 뒤를 따라 계곡으로 급강하하였다.

그러자 사찰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황해 숲속으로 도피하는 모습, 잘 위장된 참호며 능선을 따라 곳곳에 구축된 진지 등이 보였다. 계곡 동쪽 신작로를 따라 긴 언덕 위에 아군임을 알리는 주홍색 T자형 대공포판이 깔렸는데 그 곳에 진을 친 지상군이 손을 흔들며 기뻐했다. 우리들은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 5인치 로케트탄 6개, 캘리버 50 기관총 1,800발씩 장비하였고 기장만은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바로 해인사 큰절 마당에 떨어져 백색 연막이 선명하게 목표를 가리켰다.

네이팜탄 한발이면 온 사찰을 잿더미로 바꾸고 각기의 무장으로 공비의 소굴을 뿌리뽑을 수 있어 우리들의 마음은 전의에 부풀었다. 이윽고 편대장기가 급상승 선회하며 요기에 명령했다.  "각 기는 편대장의 뒤를 따르되 편대장의 지시 없이 폭탄과 로케트탄을 사용하지 말라."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소사 공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명령대로 교묘히 위장된 적의 아지트를 찾아 사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으며, 산정에서 계곡으로 마침내 궁지에 몰린 적이 우왕좌왕하고 사찰 주변으로 몰리며 숲 사이에서 최후 발악인 양 우리들에게 지상 포화를 퍼붓고 있음을 알았다. 이때 또 다시 정찰기에서 독촉훈령이 라디오를 통해 내렸다.

"해인사를 네이팜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잠시후 사찰이 불바다가 될 것을 생각하자 통쾌감마저 앞섰다.
"편대장님, 많은 적이 해인사로 몰리고 있습니다." 
나는 빨리 공격하자고 재촉보고를 하였다.
"각 기는 공격을 하지 말라."
대장님의 날카로운 명령이 다시 라디오를 통해 들렸다.
"라져, 라져.(알았습니다)"
하고 또 명령에 따르자 일렬종대로 해인사를 향해 동에서 서로 법당 용마루를 지나면서  '대적광전(大寂光殿)' 간판도 똑똑히 보였다. 숲 속에 많은 적이 모여 앉은 것을 보고 얄미워 로케트탄의 세례를 퍼붓고 싶은 충동도 있었으나 급상승 선회하다가 그 뒤 해인사 뒷산 몇 개의 능선을 넘어 폭탄과 로케트탄으로 적을 공격했다.

그날 저녁 일이다. 미 공군 고문단의 한 장교가 공지합동작전본부 소속의 장교를 대동하고 왔는데 편대 전원이 편대장실에 모였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공지합동작전에서 왔다는 소령이 자신이 오늘 가야산 목표를 유도한 정찰장교였다고 소개하므로 나는 오늘의 명령불응을 직감했다. 그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저에게 불찰이 있었습니까?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김영환 장군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니요,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고 묵직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그런데 목표를 알리는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셨습니까?" 
"네.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엉뚱한 곳을 공격하더군요. 왜 제가 공격을 중지하고 귀대하라고 훈령하였는지 아십니까?" 
"……" 

김대령님의 온화한 눈초리를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령께서는 지상군의 요청에 따라 목표를 지시하였겠지만 그것은 사찰이 아니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사찰이 전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김대령님은 국가보다도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지요.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할 것이야 없지요. 그러나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공비란 어디까지나 유동물(流動物)입니다. 그들은 일정한 전선을 형성하지 않고 있으며, 일단 그 지역에서 몰아내도 다시 침입해오는 것이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지리산 지구가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요, 낮에는 대한민국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김대령님은 공비들을 언제까지나 방치해 두자는 것이 아닙니까?"

"천만에… 해인사 일대의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그들은 현 정황으로 장기간 유지해 나갈 수 없는 독안에 든 쥐입니다. 해인사는 단지 놈들이 지리산 근거지로 통하는 통로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팔만대장경이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국보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인 문화재입니다. 가야산에 출몰하는 공비 몇 백명을 살상하였다 해서 전쟁을 판가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절은 1300년의 역사가 있고 고려 고종 24년에서 38년, 15년에 걸쳐 8만여면에 달하는 대장경을 판각해 (750년전) 봉인한 것으로 우리나라 국보사찰입니다. 소령께서도 가장 가까운 예로 2차 대전때 유럽의 파리와 일본의 경도를 폭격하지 않은 실정을 아실 것입니다. 그 처참한 대전에서도 이 도시들은 총탄 한발 맞지 않고 오늘도 그대로 인류의 귀중한 문화재로 남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들의 공중 공격을 받고 사찰로 모여든 사람들은 반드시 무장공비만이 아니라 납치되었던 양민들이 공습을 틈타 적에게서 벗어나 대피해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지상군의 보고도 그렇습니다."

그 말씀에 나는 과연 편대장님의 판단이 정확한데 또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그 미군 소령은 얼굴에 누그러진 미안한 빛을 띠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동자세를 취하고 손을 들어 경례를 하며 이해와 존경을 표시했다.
"김영환 대령님 같은 훌륭한 상관을 모신 대한민국의 공군 장병들이 부럽습니다."
우리는 김영환 대령님과 같은 상관을 모시고 활약한 결과로 오늘날 고려 팔만대장경을 살렸다고 믿는다.

김장군과 함께 당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살린 또 한 명의 군인이 있다. 전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이 그다.
1951년 8월 경남 사천에서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었던 장지량 중령은 미국비행고문단으로부터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산청경찰서에서 해인사가 빨치산 1개 대대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상부로 보고서를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장중령은 즉시 전투비행단에 폭탄과 로켓을 장착한 F-51전투기 4대의 출격대기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아찔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해인사라면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 아닌가?’
장중령의 머릿속에서는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팔만대장경이라면 세계적인 문화재인데 인민군 몇 명 잡자고 해인사를 폭격했다가는….’장중령은 고민 끝에 결심을 굳히고는 전투비행단장인 김영환 대령과 상의했다. ‘명령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팔만대장경을 지킬 것인가, 숙의 끝에 장중령과 김대령은 명령을 거부키로 했다.

출격이 지연되자 상부에서는 전투기를 출격시키라는 독촉명령이 계속 하달됐다. 그러나 장중령은 시간을 끌었고 결국엔 날이 어두워져 출격이 중단됐다. 이 같은 사실은 곧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급기야는 총살도 아닌 ‘포살(砲殺)’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방패역할을 맡고 나섰다. 김참모총장은 팔만대장경을 지켜야겠다는 장중령의 뜻을 위로 전하는데 성공했다.

장장군은 전쟁이 끝난 뒤 팔만대장경을 직접 보고는 당시의 결정이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새삼 느꼈다고 한다. 만약 군인정신만을 고집하며 상부의 명령대로 해인사를 폭격했더라면 이렇게 위대한 문화재가 흔적 없이 사라졌을 테고, 후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찔했다는 것이다.

그는 1966년 제9대 공군 참모총장에 임명됐으며, 68년 8월 예편했다. 69년부터 79년까지 에디오피아, 필리핀, 덴마크 대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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