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여 아직도 여자의 미소를 믿는가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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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 몰고온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인기 비결

 
  한 유부녀에게 솜털이 보송보송한 고등학생이 공짜로 잔디를 깎아주겠다며 접근한다. 속셈은 따로 있다. 어떻게든 수작을 걸어보려던 것. 다짜고짜 엉겨붙다가 여자가 반항하자 “내 친구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 다 안다”라며 사뭇 협박이다. 이 유부녀, 이튿날 녀석을 찾아간다. 모른 체해 달라, 사정하려고? 노. 새파란 연하남과 바람을 피운 주제에 오히려 “협박했던 거 친구한테 불어버리겠다”라며 녀석을 협박한다. 이 녀석, 당연히 쫀다. 그런데 변명이 가관이다. 자기가 아무래도 게이인 것 같아서, 여자애들이랑 하다가 잘 안되면 금방 소문이 퍼질 것 같아서 그랬다며 울먹거린다. 

  미국의 시리즈물 <위기의 주부들>은 이런 식이다. 끊임없이 뒤통수를 쳐대는 통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주부판이라는 별칭을 얻으면서 화제를 몰고 왔던 <위기의 주부들>이 한국에서도 마니아 드라마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지난 봄 백악관 만찬에서 로라 부시 여사가 출입 기자들 앞에서 유머 감각을 뽐냈을 때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부시가 잠들고 나면 나는 <위기의 주부들>을 본다. 나야말로 위기의 주부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유머 작가가 써준 원고를 읽은 것일 뿐이다. 어쨌거나 퍼스트 레이디를 위한 유머의 소재로 ‘간택’될 만큼 이 드라마는 유행의 복판에 서있었던 것이다. 

  현재 1백50여 나라에 소개되었으며, 이번 달에는 일본과 중국에서도 공중파 방영이 시작되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불륜, 자살과 살인 등 자극적인 요소로 가득찬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올해 미국 시리즈물 가운데 유일하게 국영 방송의 전파를 타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한국에서 불이 지펴진 것은 지난 7월 KBS가 방영을 시작하면서부터다(KBS2 일 밤 11시15분~1시에 2회 연속 방영). 그 전에 유료 케이블 채널인 캐치원에서 방영되었지만, 시청자가 한정되어 있는 탓에 소문이 퍼지기는 어려웠다.  마침 에미상 수상 소식도 날아들었다. 지난 9월19일 코미디 부문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이다. 이미 지난 1월 골든글로브에서는 <섹스 앤드 더 시티>를 제치고 최우수 코미디상과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당시 트로피를 쥔 주인공은 덜렁이 이혼녀 수잔 역을 맡은 테리 해처. <슈퍼맨>으로 낯이 익은 그녀는, 이번에는 리넷 역의  펠리시티 후프먼에게 여우주연상을 양보했다.   

 
  인기 비결이 뭘까. 기획 배경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작가 마크 세리는 어느 날 자기 아이 다섯을 죽인 한 여성에 관한 뉴스를 듣고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자기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일 정도로 절망에 빠진 여성을 상상할 수 있어요?”  그의 어머니는 “나도 그런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놀란 작가는 태연한 표정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여성들의 내면이 그토록 복잡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드라마를 써나간다.  

  하지만 <위기의 주부들>의 인기가, 30, 40대 여성의 일상을 잘 다루어서, 혹은 그것을 코미디 터치로 ‘쿨’하게 다루어서만은 아니다. 닳고 닳은 시청자들의 환호를 자아내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정통 추리물 뺨치는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11월에 DVD 시리즈도 출시 예정

  홍보 포스터는 드라마의 핵심 코드를 정확히 보여준다. 드레스를 입은 네 여성이 미소를 띤 채 먹음직스런 팬 케이크를 권한다. 하지만 등 뒤로 감춘 손에는 칼이며 가위 등이 한 자루씩 들려 있다. ‘소우프 오페라 형식에 서스펜스를 훌륭하게 녹여냈다’는 평론가들의 상찬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는 비평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두루 잡았다.  

  그 덕에 <위기의 주부들>은 올 여름 ‘납량물’ 노릇을 톡톡히 했다. 키득대고 웃다보면 등골이 서늘해지고, 입맛이 쓰다 싶으면 따스한 얘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흐뭇해 하다 보면 또 여지없이 뒤통수를 친다. 게다가 멜로 라인까지 덧붙여 시청자들을 꼼짝없이 옭아매는 것이다. 대중문화 평론가 강명석씨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입맛 까다로운 자녀들까지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드라마’라고 강추 사인을 보냈다.   

  KBS 김웅종 프로듀서는 5~6년 전만 해도 이런 내용을 KBS에서 방영하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실제로 편성 쪽에서는 계약을 망설였다. 외화 계약을 담당하는 KBS 미디어 김한별 프로듀서는 매력이 넘치는 드라마이지만 위험 부담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많이 주저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뒤늦게 계약에 뛰어들었다. 덕분에 하루에 두 편을 몰아 상영하는 변칙 편성안이 나왔다. 

  주저 끝에 방영을 시작했지만, <위기의 주부들>은 KBS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문화방송의 인기 시리즈물 <CSI 과학수사대>를 추월할 정도로 반응이 좋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평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웅 프로듀서는 “내용은 그대로 살리되, 대사를 완곡하게 처리하는 등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다행히 걱정보다는 우호적인 반응이 많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미 케이블 판권을 갖고 있던 온미디어측은  KBS 탓에 방영 날짜를 조정했다. 하지만 똑같은 내용을 뒤이어 내보내는 OCN으로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지상파에 방영되면서 홍보 효과를 덤으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KBS 방영 시간대가 워낙 옹색하다 보니, 이를 놓치고 애달아하는 이들에게 오전 11시에 방영되는 OCN <위기의 주부들>은 단비가 되고 있다(월~목 오전 11시. 월·화 밤 12시 2편 연속 재방송). OCN측에 따르면 <위기의 주부들> 시청률은 시리즈물 평균치의 3배 이상이다.   

  바쁜 일상 때문에 이마저도 보기 어려운 이들이라면 11월에 출시되는 DVD 시리즈(시즌1 총23편)를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미국에서도 9월20일에야 DVD가 출시된 것을 감안하면 꽤 신속한 서비스이다. 브에나비스타 인터내셔널 홈 엔터테인먼트가 마무리 작업 중이다. 

  물고 물리는 추리물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사전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재방송이나 다시보기 서비스를 간절히 외친다. 하지만 현재 방송이건 케이블이건 인터넷이건 합법적으로 다시볼 수 있는 기회는 없다. 미국 본사에서 한국에는 VOD 판권을 판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에나비스타 인터내셔널 정선미 부장은  “본사가 요구하는 복제 방지 시스템 요건이 워낙 까다롭고 결제 방식도 맞지 않아 계약이 성사된 곳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즌 2부터는 가능성이 있다. 통신업체와 인터넷 포털 등을 대상으로 VOD 판매를 협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시즌1을 섭렵한 이들이라면? 며칠 전, 9월25일부터 미국에서 시즌2가 막 시작되었다. ABC 방송사 홈페이지를 찾아가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시즌2의 홍보 비디오는 한층 화려해졌다. 사과를 칼로 쪼개자 피가 주루룩 흘러내리는 것으로 보아 등골이 서늘한 서스펜스 터치는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네 아이와 씨름하느라 항상 머리가 헝클어져 있던 리넷은  남편으로부터 서류 가방을 넘겨받는다. 집 안에서 칼을 가는 여성들과 집 울타리를 벗어난 여성들이 가세해 무대가 한층 넓어지는 것이다. 인기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 배우 할 베리 등이 카메오로 출연할 예정이어서 뒷얘기도 풍성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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