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가난뱅이 재앙이 백인 부자들에겐 횡재”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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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들 재건 사업 소외되자 ‘술렁’…친 부시 기업들은 ‘짭짤’

 
거의 1천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천문학적인 재산 피해를 낸 사상 최악의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루이지애너주 뉴올리언스시. 이곳 출신 수십만 흑인들은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그리운 집과 일터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카트리나에 이어 허리케인 리타가 또다시 이 지역을 강타할 조짐을 보이는 데다, 뉴올리언스에서 아직 식수와 전기 공급은 물론 병원 시설이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많은 이재민을 수용하고 있는 텍사스 주를 포함해 30개 주에 분산해 있는 1백만명 이상의 흑인 이재민들은 지난 9월15일 부시 대통령이 발표한 지원책에 다소나마 기대를 걸고 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전국으로 생중계된 TV 연설을 통해 피해를 지역의 다리·학교·상수도 등 사회간접시설 복구비 대부분을 연방 정부가 떠맡겠다고 공약했다. 또 피해 주민들과 자녀들을 위해 직장과 교육·주택·의료 혜택 확보를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 루이지애너 주를 비롯해 피해를 입은 3개 주에 대해서는 ‘걸프 기회 지대’로 선정해 각종 세제 혜택과 함께 기업 유치를 촉진시키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이 추산하는 재건 비용은 최소 2천억 달러를 웃돌지만 의회가 지금까지 책정한 복구액은 고작 6백23억달러에 불과하다.

 이처럼 부시 대통령의 구호 대책에도 불구하고 정작 피해 당사자인 흑인들의 반응은 그다지 탐탁지 않은 편이다. 부시가 내놓은 대책은 얼핏 보면 엄청난 것 같지만 막상 속내를 들여다보면 흑인들이 요구한 사항들은 대부분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시는 이재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유인책을 제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흑인 등 소수 민족 출신의 기업가들이 재건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흑인 대표들은 연방 정부에 적지 않은 요구 사항을 내놓았다. 카트리나로 고아가 되었거나 부랑아가 된 어린이들에게 연방재난관리청이 보조금을 지급하라는 것은 그중 하나다. 모든 재건 사업의 40%를 흑인 등에게 할당하고, 민권 조항이 계약서에 들어가기 전까지 수주 계약을 실시하지 말 것도 요구했다. 아울러 피해 지역에 앞으로 최소 1년 간은 주택 압류를 금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중 어느 것도 복구 대책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흑인들의 불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이 연설을 통해 인정했듯이 이번 피해 지역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기회의 창을 닫아버린 인종 차별의 역사와 그에 따른 뿌리깊은 빈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부시의 지원책으로 이런 문제들이 하루아침에 말끔히 해결되리라고 보는 흑인들은 거의 없다. 오히려 부시의 지원 대책이 100% 실현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문제 해결의 시작이지 완결은 아니라는 것이 많은 흑인들의 생각이다.

“비용 절감한다고 가난한 자들 임금조차 깎아”

특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각종 재건 사업과 관련해 각종 의혹이 불거져 나오면서 흑인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은 더 커지고 있다. 미국 내 흑인 교회들을 이끌고 있는 유진 리버스 목사는 “카트리나 참사는 부시 행정부에 미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인종과 빈곤이라는 도전을 안겼다”라고 말하고 “우선은 카트리나 재건 사업이 백인들만 더욱 살찌는 식의 또 다른 형태의 인종 분열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지적했다. 또 흑인으로서 TV 선교로 전국적인 영향력을 갖는 T.D. 제이크스 목사는 “현재 흑인들은 재건 사업이 제대로 시행되는지 여부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부시 행정부를 평가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재건 사업을 놓고 벌써부터 잡음이 불거지고 있다. 일부 피해 지역에서는 부시 행정부와 끈끈한 연이 닿은 대기업들과 로비스트들이 재건 특수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지만, 정작 흑인 주민들과 흑인 기업들은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불평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 노동부는 복구의 긴급성을 이유로, 종업원 50인 이상의 중소 기업들이 직원을 채용할 때 반드시 소수 민족을 고용하도록 한 기존 채용 규정을 카트리나 재건 계약업자들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발표해 충격을 던졌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9월15일 연설을 통해 재건 비용 절감을 이유로, 피해 지역 건설 노동자들에게 현지에서 통용되는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도 흑인들을 격분케 하는 요인이다. 이같은 제한 조처만 없어도 흑인 노동자들이 기준 임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일당을 받고 피해 복구 작업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지난 대선 때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나섰던 에드워드 케리 상원의원은 “백만장자들의 세금은 깎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부시가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임금은 깎아내리는 데 열심이다”라고 맹비난했다.

그뿐 아니다. 복구비 집행의 대부분을 떠맡은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우선 30만 채의 임시 주택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수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시공권을 공식 입찰 방식으로 하지 않고 수의 계약으로 내줘 흑인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특히 수주를 따낸 업체들 가운데는 과거 부시 후보에게 거액의 정치 헌금을 제공한 사람들로 끼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커지고 있다.

현재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대표적 업체는 쇼 그룹과 할리버튼 그룹. 쇼 그룹은 부시 대통령의 전직 선거 운동 매니저를 지냈고 지금은 로비스트로 변신한 조우 앨라바우의 단골 고객이다. 쇼 그룹은 이번 카트리나 구호 사업에서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택 건설과 관리 업무 계약 건으로 연방재난관리청으로부터 1억 달러짜리 사업권을 수주받았다. 쇼 그룹은 그뿐 아니라 공병단으로부터 각종 건설 관련 수주액으로 1억 달러를 받아 이번 재건 사업의 최대 수혜자로 떠올랐다.

할리버튼 그룹은 한때 딕 체니 부통령이 사장을 맡았던 인연을 계기로 이라크 재건 사업 참여 때 특혜 시비가 일었던 기업인데, 이번 카트리나 재건 사업에서도 계열사인 켈로그 브라운이 참여해 2천9백만 달러의 계약을 따냈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이런 수주 행태에 대해 반부시 대열의 선봉장인 제시 잭슨 목사는 “허리케인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재앙이지만 부자들에겐 횡재의 기회이다”라며 신랄히 비판했다.

 이처럼 재건 사업에 따른 잡음과 의혹이 연일 터져 나오는 가운데 일부 중진급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이 재정 적자를 걱정하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 것도, 흑인들의 불만 사항이다. 실제로 상하원 가릴 것 없이 공화당 의원들은 부시가 ‘돈이 얼마 들던 상관없이 재건 사업을 전폭 지원하겠다’고 한 공약이 무색할 정도로 천문학적 복구비에 대해 엄살을 떨고 있다. 단적인 예로 톰 코번 상원의원은 “루이지애너 주가 입은 피해 전체를 우리가 모두 부담해야 한다고 보지 않으며 일정액은 주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라고 소리를 높였다.

물론 코번 의원과 달리 복구비 증액론자들의 목소리도 크지만, 흑인들은 복구 비용 자체를 놓고 공화당 의원들이 왈가왈부하는 ‘저의’에 대해 크게 못마땅하다는 분위기다. 이들은 예산 집행권을 쥔 공화당 의원들의 이같은 행태로 미루어 부시가 제시한 지원 대책이 ‘공수표’가 될지 모른다며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카트리나 참사와 관련해 보여준 늑장 대응은 가까이는 내년 11월 의회 중간 선거, 그리고 멀리는 오는 2008년 대선에서 흑인들의 표심으로 심판받을 것 같다. 미국 정치에서 흑인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 세력이었다. 단적인 예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빌 클린턴은 지난 1992년과 1996년 흑인표의 90%를 가져갔다.

그러나 지난 2000년 대선을 계기로 이런 추세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흑인 유권자들은 지난 2000년과 2004년 대선에서는 흑인 등 소수 민족을 널리 포용하겠다는 ‘인정 어린 보수주의’를 표방한 공화당 부시 후보에 대해 각각 9%, 11%의 지지표를 던졌다. 비록 큰 수치는 아니지만 간발의 표차로 우열을 가렸던 상황을 감안하면 부시 진영으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카트리나 재앙을 계기로 전통적인 민주당 성향의 흑인 유권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시 대통령에 기대를 걸었던 대다수 흑인들이 급속히 공화당 지지 대열에서 이탈할 조짐이다.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의회도 위태롭다. 현재의 정치 지형이 내년 중간 선거를 계기로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매릴랜드 대학의 론 월터스 정치학과 교수는 “지난 대선에서 공화당은 흑인 표를 파고드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이번 카트리나 참사를 계기로 흑인 표는 물건너 갔다”라고 분석했다.

특히 일부 흑인 명사들이 부시 행정부의 카트리나 늑장 대응을 흑백 인종 차별 차원에서 비판하기 시작하자 흑인 유권자들의 반 부시, 반 공화당 정서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한때 민주당 대선 후보로도 나왔던 저명 인권 운동가인 제시 재슨 목사는 “부시 행정부가 늑장 대응하게 된 배경에는 고통 받는 흑인에 대한 무관심과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유명한 흑인 랩 가수인 케인 웨스트는 카트리나 피해자를 위한 모금 운동이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부시는 흑인을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공개 천명해 숱한 흑인 유권자들의 반 부시 감정을 고조시켰다.

흑인 사회 반응은 썰렁

실제로 유명한 여론조사 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가 카트리나 참사 2주가 지난 시점에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내 흑인 10명 중 7명은 피해자 중 백인이 다수였더라면 연방 정부의 대응은 훨씬 신속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공화당 지도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공화당 일각에서는 현재 30개 주에 분산된 수만 명의 뉴올리언스 출신 흑인 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재배치된 주에서 터를 잡고 현지 주민들과 동화해 정착하기를 노골적으로 바랄 정도다. 지난 30년 이상 뉴올리언스는 흑인 유권자들이 밀집한 탓에 민주당의 철옹성으로 간주되어 왔던 곳이다.

현재 위기 의식이 팽배한 백악관과 공화당 지도부는 카트리나 피해 복구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흑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쳐온 흑인 종교 지도자들과 연쇄 접촉하며 부정적인 인식을 지우는 데 총력을 쏟고 있다.

 
실제로 제임스 토우이를 비롯한 부시의 국내 담당 참모들은 흑인목회연합 총재인 빌 오웬스 목사를 포함해 일부 유력한 흑인 종교 지도자들과 하루에도 서너 차례 전화 접촉을 가지며 흑인 민심을 다독거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흑인 표 다잡기에 나선 총책은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인 켄 멜먼. 지난 1월 현직에 취임한 그는 공화당 연방의원 사무실은 물론 주 의원 사무실에 흑인 채용을 대폭 강화해 공화당 지도부의 찬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대외적으로 이번 카트리나 참사가 곧바로 공화당에 대한 흑인 표 이탈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상태이지만, 내심 안절부절이다. 현장에서 들리는 흑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화당에 대한 불만 일색이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 소재 흑인 대학으로 유명한 하워드 대학의 법과대학 학생이자 이 대학의 공화당 학생지부장을 지낸 애덤 헌터 군은 “카트리나 참사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대응은 분명 실패했으며 치욕적이었다. 흑인들의 표심을 다시 얻기란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흑인 사회학자인 데이빗 보스티스 박사는 “공화당이 흑인 표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문제는 흑인들은 공화당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트리나 참사 이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공화당에 대한 흑인들의 신뢰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라고 설명했다.
 집권 2기에 들어선 부시 대통령이 카트리나 후폭풍에 따른 흑인들의 민심 이반으로 때이른 레임 덕에 시달릴 공산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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