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경제 과외’ 속도전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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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등 해외 연수·초빙 강연 줄이어…금융·무역 등 집중 학습

 
북한과 서양간 교류·협력 프로젝트는 결코 북한 김책공대와 미국 시라큐스 대학 간의 프로젝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시장 경제 학습에 열을 내고 있다. 비록 제한된 테두리이기는 하지만, 경제 관료나 전문가 들을 해외에 내보내 연수시키는 일이 빈번하고, 외부 전문가들을 모셔 한 말씀 듣는 자리도 스스로 알아서 만들고 있다. 겉으로는 미국과 싸우느라고 목청을 높이지만, 안으로는 개방을 준비하느라고 나름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4·5일 양일간 평양 양각도호텔에서는 북한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국제 행사가 열렸다. 북한 외무성과 무역성이 유엔개발계획(UNDP)과 손잡고 개최한 ‘무역 포럼’이 바로 그것이다. 말이 ‘포럼’이지 이 때의 행사는 한마디로 외부 인사를 초청해 북한 관료들에게 일방적으로 ‘시장 경제의 이점’을 학습시키는 자리였다.

국립 오스트레일리아 대학 피터 드리즈데일 교수(경제 정책)가 행한 기조 연설이 단적인 예이다. 그는 이 행사를 위해 A4 용지 20장 분량의 영어 기조 연설문을 준비해갔다. 이 연설문의 제목은 <경제 성장 및 발전의 핵심으로서 무역의 역할>이었다. 내용은 무역이 가져다주는 이점을 ‘정태적 이점’과 ‘역동적 이점’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일종의 비교우위론을 또 다른 각도로 풀이한 정태적 이점의 핵심은, 무역이 경제 성장은 물론 삶의 수준을 높인다는 것이다. 역동적 이점은, 무역이 발상과 지식·기술의 흐름을 촉진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드리즈데일 교수는 북한 청중이 알아듣기 쉽게, 현대 경제학자는 물론 존 스튜어트 밀 등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주장까지 곁들였다.

드리즈데일 교수는 지난 9월 초 서울 체류 중 <시사저널>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당시 행사의 분위기를 전했다. 북한측이 특히 관심을 보인 부분은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운영 원리’에 대한 설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면서, 북한에 세제 시스팀이 취약하다는 점을 되풀이 강조했다고 밝혔다.

북한 당국이 시장 경제 본고장에서 권위자를 초청해 ‘과외’를 받은 일은 또 있다. 미국 뉴욕 대학 제롬 코언 교수의 ‘법학 강의’가 그것이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 오랫동안 몸 담았고, 미국에서 비교법학 분야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제롬 코언 교수는 미국 다트머스 대학 데이비드 강 교수의 전언에 따르면, 북한을 최소한 두 차례 방문해 ‘기업법’을 강의했다. 당초 북한측 태도에 회의적이었던 그는, 막상 북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열심히 질문하는 데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배우려는 열의 대단”…북핵 위기에 잠시 주춤

북한이 세계화한 세상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책가방을 메고 스스로 바깥으로 나가는 경우는 훨씬 더 많다. 지난 9월22일 연합뉴스는 북한 고급 관리들의 스위스 연수 사실을 확인해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북한 관리 14명이 스위스개발협력처(SDC)의 지원을 받아 현재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협상응용연구센터(CASIN)에서 집단 연수를 하고 있다. 이 기관에 대한 북한 관리들의 집단 연수는 지난해 8월에도 있었으며, 당시 연수에 참가한 관리들의 소속은 외무성, 경공업성, 큰물피해대책위원회, 무역성이었던 것으로 연합뉴스는 보도했다.

 
북한이 옛 공산권 국가나 중국을 제외한 나라에 인력을 파견하는 방식의 교류를 추진한 전반적인 현황은, 2001년 캐나다 밴쿠버 대학의 한국계 박경애 교수(정치학)가 조사해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오스트레일리아·중국·이탈리아·스웨덴 등으로 관료를 파견해 왔다. 2001년에만 북한 사람 4백80명이 이들 나라에 흩어져 금융·무역·회계·파산법 등을 ‘학습’했다는 것이다.

2002년 10월을 기점으로 본격화한 제2차 북핵 위기가 없었더라면 북한 당국의 시장 경제 배우기는 훨씬 더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제2차 북핵 위기는 시장 경제를 학습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북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눈에 띄게 위축시켰다. ‘자본주의 몸살’을 앓을까 봐 문호를 꼭꼭 걸어잠그고 있던 북한이 어렵사리 용기를 냈다가, 다시 꼬리를 감춘 격이었다. 

단적인 예가 북한 관료들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으로는 가장 먼저 시작되어 고전적인 사례로 꼽히는 국립 오스트레일리아 대학의 북한 관료 연수 프로그램의 난항이다.

이 프로그램은 1995년부터 입안되어 자금 조성 등 3년 간의 준비 끝에 1997년부터 실행에 옮겨졌다. 지난 5월 평양에서 열린 무역 포럼에서 기조 연설을 한 피터 드리즈데일 교수도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북한과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국립 오스트레일리아 대학은 당초 북한에 이같은 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째, 최소 1년 이상 장기 체류할 것. 둘째, 장래가 유망한 청년 엘리트들로 연수단을 구성할 것. 이는 기왕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할 참이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내실을 기하려는 차원에서 국립 오스트레일리아 대학이 제시했던 것이다.

양측이 모두 성의 있게 임했던 탓에 이 프로그램은 순항했다. 1999년 북한측은 2차 연수 인력을 오스트레일리아에 파견했다. 연수 기간도 2년으로 늘려 잡았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2차 북핵 위기의 유탄을 맞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2001년 9·11 테러가 터진 뒤 미국이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편을 들었다. 게다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마약을 단속한다는 명목으로 북한 선박을 단속한 바도 있다. 양국 관계가 악화하면서 이 프로그램은 중단되었다. 물론 ‘일시 중단’이라는 꼬리표를 달기는 했다.

물론 그 뒤로도 북한 당국이 민간 차원에서 시장 경제를 학습하느라고 애쓴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특히 에너지·환경 분야에서는 국제적인 비정부기구 모임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다.

북한의 이같은 움직임에 깔린 진정한 의도에 대해 미국 내에서는 두 갈래 상반된 평가가 있어왔다. 대북 강경파는 북한의 움직임을 ‘제스처일 뿐 진정한 개방 의도는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한 나름의 개혁·개방 의지를 높이 사서 격려·고무해야 한다는 비둘기파 주장도 있다.

논쟁을 잠깐 접고 양쪽 모두 경청해야 할 경험담이 있다. 바로 피터 드리즈데일 교수의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사고의 혁명이다. 50~60 년간 고립의 길을 걸어온 북한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최근 나는 북한 사람들이 무척 빠르게 (시장 경제를) 배우고 있음을 목격했다. 과거 경제 성장기에 남한이 그랬던 것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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