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모델로 동북아 체제 개편한다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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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북·미 평화협정→지역 안보 협력 기구 설립 구상…4차 6자 회담 합의로 토대 마련

 
미국의 대외 정책은 크게 보면 매우 단순하다.‘개입(engagement)’아니면‘봉쇄(containement)’라는 두 가지 기본형으로 압축된다. 봉쇄의 시기에는 모든 것이 분명해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개입의 시기로 접어들면 갑자기 복잡해진다. 전자가 주로 강경파·군부가 주역이라면 후자는 전략가·전문가 등 이른바 ‘꾼’들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부시 1기 정부 때 흩어졌던 꾼들이 2기 정부 들어 다시 뭉쳤다. 라이스 국무장관이 그 꾼들의 왕초라면 힐 차관보는 실무 사령탑이다. 최근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된 알렉산더 버시바우에 대해서는 ‘거물급 현장 감독’ 등장이라는 시각이 서울 외교가에 퍼져 있다.

라이스-힐-버시바우로 이어지는 트리오 체제의 키워드는 바로 ‘유럽 모델’이다. 레이건-부시 1기 정권 시절인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이들은 소련·동유럽의 체제 전환과 유럽 신질서 구축 과정에 깊이 관여하며 내공을 쌓았다. 이들뿐 아니라 ‘보스니아 내전의 해결사’ 힐 차관보가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맡은 이래 미국 국무부는 유럽파가 모두 장악했다. 바야흐로 이들이 주도하는 한반도와 동북아 외교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짚어보게 하는 대목이다.

힐 차관보 스스로 그 지향점을 분명히한 바 있다.  지난 2월22일, 주한 미국대사이던 그가 6자 회담 수석대표 및 동아태 차관보로 내정된 바로 직후였다. 외국어대 총동문회가 ‘동북아 평화와 발전을 위한 한·미 관계’라는 제목으로 시내 한 호텔에서 개최한 조찬 강연은 그의 출사표나 다름없었다. 당시 언론은 6자 회담에 대한 몇 마디 말에만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관심의 폭을 넓히면 귀가 번쩍 뜨이는 ‘한 소식’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날 강연은 거의 대부분 유럽에 대한 얘기였다. 냉전 당시 동서로 갈렸던 유럽이 1975년 헬싱키 선언을 계기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결성해 재래식군축협상을 시작했고,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뒤에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로 발전시켜 체제 전환과 경제 교류, 인권 개선 등 시대적 과제를 달성했던 사례를 언급했다. 미국이 이같은 유럽 역사의 도정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측 협상 주역 모두 유럽 전문가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다음 대목이었다. 그는 ‘왜 유럽에서는 가능했던 일이 동북아에서는 안된다고 하는가’라는 도전적 질문을 던지며, 그동안의 통념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동북아 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치렀고 과거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쉽지 않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견원지간을 방불케 했던 프랑스와 독일이 어떻게 화해했는가를 거론하며 반박했다. 거대한 중국이 등장함으로써 국가의 규모와 국력의 차이에서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마케도니아 대사 시절 미국과 마케도니아 관계를 증진시켰던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기도 했다.

의지가 있고 접근 방법만 옳다면 국가의 규모와 상관없이 서로 대등하고 좋은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북핵 문제, 6자 회담이 긴급 현안이지만 그 이후 이 지역의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할 때다”라는 것이 그의 문제 의식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심중에는 그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유럽 모델’ 적용, ‘동북아판 OSCE 구상’이 바로 그것이다. 라이스 국무장관이 2004년 7월 중국 지도부에 제의했다는 ‘동북아 안보협력체 구상’의 내용이 더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낸 것이다. 

 
약 9개월 후인 지난 9월19일 베이징. 제4차 6자 회담 2단계 회담에 참여했던 동북아 6개국 대표들은 마치 힐의 ‘예언’을 입증이나 하듯 ‘기적’ 같은 일을 연출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동북아 주요 국가가 한데 모여 ‘공동의 안보협력 증진’,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날 합의는 단순한 구두선이 아니라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북·미 북·일 국교 정상화-동북아 안보협력이라는 큰 틀의 단계별 일정을 담고 있어 그 어떤 국제 협약보다 실천적인 것이었다. 비록 경수로를 둘러싼 그 후의 논란이나 추상적이고 모호한 표현으로 인해 ‘진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에서 이제 본격화하기 시작한 21세기 동북아 질서의 향방을 예의 주시하게 한다.

어떤 면에서 그 단계별 일정은 이미 시동이 걸린 상태다. 베이징 6자 회담에 모든 시선이 모아지고 있을 때, 무대 밖에서는 한반도의 현상 변경을 위한 은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9월13~16일 평양에서 있었던 제16차 장관급 회담. 공교롭게 같은 시기 열린 6자 회담에 가려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지만, 평양을 찾은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심중에는 북측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한 ‘중대 제안’이 들어 있었다. 적어도 방북하기 며칠 전까지 주무 부처인 통일부 당국자들은 극비리에 그 제안의 세부 내용을 다듬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국, 남·북·미 3자 평화협정 구상

바로 ‘평화협정’과 관련한 제안이었다. 회담 직후 대변인 발표 등을 통해 ‘남북간 평화문제 논의’ 등 모호하게 알려졌고, 그 이후 통일부·외교부 당국자들을 통해 편린이 일부 드러났지만, 당시 정부가 가지고 간 보따리는 대단히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남북간 신뢰 구축 및 군비 축소, 서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 등의 군사적 내용에서부터 국군 포로 및 납북자 문제 등 인도적 문제, 나아가 남북 정상회담으로 연결될 사안들까지, 남북 관계를 한 단계 높일 내용들을 포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학자들 간의 이론 차원이 아니라 한반도의 현상 변경을 위한 중심 고리로, 평화협정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의 새로운 ‘평화협정안’이 현상 타파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은 바로 협정 당사자 문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정부는 그동안 두 가지 안을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 하나는 남북한과 미국의 3자협정안, 그리고 또 하나는 여기에 중국이 포함되는 4자회담안이다.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자가 북한·미국·중국이라는 법적인 측면을  놓고 보면 중국의 참여가 필수이다. 그러나 정전체제라는 현실의 당사자가 남북한과 미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남·북·미 3자협정이 효율적이다. 정부의 내심은 이미 이 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다. 다만 중국의 반응을 저울질하고 있는 형국으로 보인다.

왜 지금 평화협정인가. 바로 9·19 공동성명과의 함수관계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평화협정은 제4항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도화선이자, 제2항 ‘북·미 관계 정상화’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9·19 성명이 탁상공론이 아니라 강력한 실행 파일에 의해 규율되는 현재진행형의 국제 협정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사례인 것이다.

미국 진짜 속셈은 ‘경수로 대신 화력 발전’

경수로 문제로 들어서면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경수로 제공을 위한) 적절한 시기’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논쟁에서부터, 신포 경수로와 새로 언급된 경수로의 관계도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미국이 ‘여전히’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할 의사가 없다는 점이다. 라이스 장관이 이미 ‘논의해볼 수 있다고 한 것’이라고 한 발을 뺐고, 발비나 황·잭 프리처드·고든 프레이크 등 한반도 전문가들 역시 ‘가능성이 없다’는 쪽으로 입을 모았다.. 

 
9·19 전야, 부시 행정부 내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워싱턴 소식통의 얘기를 들어보면, 미국의 진의가 분명해진다.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 미국 외교안보팀 고위 관계자들이 모두 백악관에 모였다고 한다. 국무부뿐 아니라 강경 성향의 네오콘 인사들도 포함되었다. 이 자리에서 라이스 국무장관은 경수로 지원이 포함된 중국의 4차 초안 수정안을 설명하면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카트리나 피해, 이라크 전쟁, 여기에 6자 회담 결렬 책임까지 뒤집어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수로에 대해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여 온 강경파 네오콘 인사들이 수긍을 한 데에는 라이스 장관의 그 다음 말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즉 ‘북한에게 경수로를 진짜 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시점에 다른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 대안이 바로 화력 발전소이다. 지난 7월 열린 1단계 회담이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권 주장, 즉 경수로에 대한 요구로 휴회에 들어간 이후,  미국 국무부는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경수로 대신 화력 발전소를 제시하는 안이 이때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회담에서는 그 카드를 꺼내지 않았지만 이미 이같은 복안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경수로를 수용하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앞으로 북한을 설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국무부는 낙관적이라고 한다. 북한이 절실하게 원하는 테러지원국 해제와 경제제재 해제 등을 선물로 얹어 제안할 경우 북한이 받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편 국내의 한 북한 소식통은 “미국은 베이징 2단계 회담 전에 이미 북한에 비공식 채널로 화력 발전소 안을 제시했다. 북한 역시  심사숙고 중이다”라고 전해오기도 했다. 미국이 제시한 화력 발전소 안은 북한산 석탄을 주연료로 총량 3백만 kW 규모라고 한다(<시사저널> 9월13일자 829호 참조). 즉 이번 회담 전에 북한은 이미 미국측의 대안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담을 ‘경수로 회담’을 방불케 할 정도로 몰아붙인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돈 문제였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미국이 당시 대안은 내놓았지만 이를 집행할 ‘펀딩 계획’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자금 계획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 약속만 믿고 기존 주장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셈이다.

과거 신포 경수로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이번에도 기획과 총감독 역할을 담당하고    ‘펀딩’은 다른 곳에서 할 요량이다. 우선 한국이 있을 수 있다. 이미 제시한 대북 송전 계획을 변용할 수 있다. 더 유력한 자금줄은 일본인데 그동안 총선 등의 국내 사정 때문에 조율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회담 기간에 북·일 간에 다섯 차례나 수석대표 접촉이 있었고, 조만간 정부간 교섭 재개도 약속이 되어 있다.  환경 조성이 시작된 것이다.

조만간 고이즈미 총리의 방미나 이에 버금가는 미·일 협의, 그리고 북·일 막후 채널을 통해 ‘펀딩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와 병행해 11월 초 5차 회담 또는 그 전이라도 자연스레 새로운 대안에 대한 얘기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또한 지금 거론되고 있는 것처럼 힐 차관보의 방북이 이루어지면 경수로 문제에 대한 매듭뿐 아니라 그 이후의 일정까지 협의될 것이다. 그 일정에 따라 한반도와 동북아 지각 변동의 방향이 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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