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보다 아늑하고 호텔보다 편하네
  • 진창욱 발렌시아 해외 편집위원 ()
  • 승인 2005.10.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RV에 푹 빠진 ‘모터홈’족 급증

 
4년 전 은퇴한 미국인 프레드 데이비스 씨(65)는 지난해 구입한 1978년도산 모터홈에 푹 빠져 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벤투라 카운티 필모어 시의 뱅크오브아메리카 지점장을 끝으로 45년간의 은행원 생활을 그만 두었다. 그가 은퇴하면서 바꾼 것은 또 있다. 그는 지난 26년간 즐기던 소형 비행기 조종 취미를 접고 모터홈에 빠져들었다.

그는 한때 소형 비행기를 두 대나 소유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처분한 뒤 제너럴 모터스의 낡은 모터홈을 구입한 후 수리에 수리를 거듭한 끝에 새롭게 단장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마침내 자신의 고국인 캐나다까지 왕복 14일 간의 모터홈 여행을 감행했다.

화가인 부인과 단 둘이 살고 있는 그의 모터홈은 승용차 2대와 트럭 1대에 이어 4번째 사들인 차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RV'에는 버스처럼 바퀴가 달려서 움직일 수 있는 집 형태와, 트럭 등에 견인되는 트러일러형 두 가지가 있다. 이들 내부에는 침실과 식당, 화장실, 샤워실은 물론 소파와 텔레비전, 인터넷과 연결된 컴퓨터 등이 갖추어져 있다. 한 대 가격이 50만 달러에 이르는 고급 모터홈의 내부 치장은 웬만한 부자의 고급 주택이 부럽지 않다.

프레드 데이비스 씨는 기자를 만나자 여행에서 겪었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모터홈 여행담을 털어 놓았다. “나이가 들면 모터홈 여행만한 것이 없지요. 편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요”.

그가 말하는 모터홈의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직장에 메인 몸이 아니니, 운전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고, 쉬고 싶은 데에서 마음대로 쉴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행기나 기차 또는 단체 관광 버스를 타기 위해 짐을 꾸리거나, 택시를 잡아타고 가서는 출발할 때까지 기다리고, 호텔에 도착하면 무거운 짐을 끌고 방에 들어갔다가, 다음 날 다시 짐을 꾸려 똑같은 일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 늘그막에 무거운 짐과 씨름하다 결국 여행이 끝난 며칠 뒤 앓아눕는 사태를 걱정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모터홈의 즐거움을 알고 이를 만끽하는 미국인은 프레드 데이비스 씨말고도 많다. 미국에는 현재 7백20만 대의 RV 차량이 운행되고 있다. 이중 1/3 정도가 모터홈이라고 보면, 미국 전역에 2백만대 이상의 모터홈이 운행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03년과 2004년에는 RV 차량 판매량이 30만대를 넘어섰고, 이는 전년도에 비해 14·15% 증가한 수치다. 이 추세대로 간다면 오는 2010년 미국 가정 10 가구 가운데 1 가구가 모터홈을 비롯한 RV 차량을 소유할 것이라는 것이 RV 애호가 협회의 추산이다.

미국, RV에 푹 빠진 ‘모터홈’족 급증

그러면 미국인들 가운데 도대체 누가 RV를 타며, 왜 타는 것일까. 모터홈 등의 소유와 별개로 지난해 RV를 빌려 여행한 경험이 있는 미국인은 무려 3천만명에 이른다는 것이 이 협회의 집계다. 상당히 대중화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평균 여행 거리는 7천2백km이고, 평균 여행 기간은 30일로 나타났다. 이는 RV가 장거리·장기간 여행 수단으로 미국인들에게 각광받고 있음을 알려주는 수치이다. RV 소유주의 평균 연령은 50세. 물론 애호가가 가장 많은 연령층은 35~49세이지만, 평균 연령이 50세라는 것은 그만큼 나이 많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며, 이들 중 상당수는 은퇴자임을 의미한다.

은퇴자라고 하면 나이가 들어 보행도 어려우며 외롭게 사는 노인을 연상하기 쉽지만, 미국에서는 60세가 넘어도 건강하고, 은퇴 연금 등으로 경제적 여유까지 누리는 이가 많다. 모터홈 등으로 여행하며 여생을 마음껏 자유롭게 즐기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또 모터홈 여행은 다른 방식의 여행에 비해 최대 75%까지 경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따라서 이들이 RV를 선호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미국은 땅이 넓고 휘발유 값이 상대적으로 싼 편이며 도로 사정과 RV 편의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RV가 여행 문화의 중요한 양상이 될 수 있다. 유럽에서 미국처럼 RV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다른 아닌, 미국에 비해 두 배가 넘는 휘발유 가격 때문이다.

미국의 한 여행 전문가는 지난 2003년과 2004년 RV 여행자가 급증한 것은 2001년 발생한 9·11 테러와 관계가 있다고 분석한다. 국제 테러를 두려워한 다수의 장년·노년층이, 해외 항공 여행 대신 국내 자동차 여행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 내 호텔 등 숙박업소들은 사상 최고의 객실 판매율을 기록했다. 이 또한 9·11 테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이 여행 전문가의 설명이다.

이같은 RV 여행 추세와 함께, RV와 관련된 미국인의 독특한 생활 패턴도 눈길을 끈다. 미국에는 ‘RV 풀타이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1년 내내 모터홈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은퇴 후 아예 살던 집까지 처분해 모터홈을 구입해서는 미국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행으로 여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0대 소녀 멜리나 칼슨은 또 다른 부류의 풀타이머이다. 멜리나는 가족과 함께 지난 1998년부터 모터홈에 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8년간 멜리나네 가족은 전국을 여행하고 있다. 멜리나의 교육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홈스쿨링 방식으로 해결한다. 교우 관계는 몇몇 친구를 집중적으로 사귀는 대신, 수많은 친구를 두루두루 사귀는 것으로 만족한다. 멜리나는 “내가 사는 공간은 폭 3,3m 길이 10.3m에 지나지 않고, 이마저 4인 가족이 함께 사용하지만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RV 풀타이머로 가장 이름난 사람은 최근 미국 PGA 게임에서 우승한 프로 골프 선수 필 미켈슨이다. 메이저 대회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한 그는 잇단 골프 투어에서 성공하기 위해, 50만 달러짜리 최고급 모터홈을 구입해, 여기서 먹고 자고 쉬며 이동한다. 불필요한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골프에 전력을 다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에서 RV는 프레드 데이비스 씨처럼 은퇴 생활의 호사로움을 즐기는 수단이거나, 칼슨 가족처럼 생활 그 자체가 되거나 미커슨처럼 프로페셔널의 도구로 쓰이는 등 다양한 생활의 방편이 되고 있다.
발렌시아·진창욱 편집위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