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무서움
  • 고종석 ()
  • 승인 2005.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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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그 전날의 과음을 후회하며 대낮까지 침대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신, 옛 직장 친구였다. “정운영 선생이랑 친했지?”라고 그는 물었고, 나는 그 친구의 과거형 어법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뜬금없는 걸 다 물어보네 생각하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이의 글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내 말투는 아마 좀 퉁명스러웠을 것이다. 친구는 알았다며, 정선생이 타계한 소식을 내게 전했고, 우리는 좀 어색하게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머리 속이 하얬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나는 정선생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신문사에서 평기자로 일했다. 그러나 그이를 가까이 접할 기회는 없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정선생은 성격이 깔끔하다못해 까다로운 듯 보였고, 나는 까다로운 선배에게 먼저 다가가 너스레를 떨 만큼 무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무렵 그 신문의 간판 칼럼이라 할 정선생의 ‘전망대’에 매료된 수많은 독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 글들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싫기도 했던 것은, 정선생의 어떤 생각에 내가 동의하지 않아서만이 아니었다. 맞장구칠 수 없는 생각을 담은 글도 그 품격에 홀려 좋아할 수 있을 만큼, 나는 글의 메시지에 관한 한 무던하다. 정선생의 어떤 글이 내게 꺼림칙했던 것은, 더러,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발언을 정선생이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섯 해 전에 한 잡지에 흘린 글에서, 나는 정선생의 글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정운영의 90년대 글쓰기의 가장 큰 공로는 한국어 산문 문장의 화사함을 한 단계 높인 데 있다. 정녕 그는 화사한 문장이라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더불어, 실천과 분리된 화사함이 얼마나 허망한지도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 당파성으로 화사하게 치장한 정운영의 글은 가장 부르주아적으로 소비된다. 그의 글을 읽고 열광하던 학생들은 이제 신참 부르주아로서 주식 시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그가 그리워하는 마오 시절의 중국이나 그에게서 감동적인 조사(弔辭)를 선사받은 알튀세르는 이 신참 부르주아들의 삐까번쩍한 지적 장식품 구실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고 나는 썼다. 친구에게서 정선생의 부고를 듣고,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이 이 글이었다.

옛 프랑스 지식인들의 모습에 포개지는 정운영 선생의 편린

그러나 정선생이 지금 건강하게 살아 계시다면, 나는 이 말을 거둬들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10년쯤 전, 자크 쥘리아르와 미셸 위노크가 편집한 <프랑스 지식인 사전>이라는 책을 훑어보며 대뜸 떠올린 사람이 정선생이었다. 대부분이 좌파이고 상당수가 유물론자인 그 책의 등장 인물들이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에 열광하는 모습을 살피며, 나는 공언된 역사적 유물론이란 뒤집어놓은 관념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씁쓸히 확인했다. 모스크바 재판을 옹호하는 엘뤼아르가 <연인>의 시인 엘뤼아르 바로 그 사람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은 뒤숭숭한 일이었다. 물론 정선생은 스탈린을 옹호하지도 않았고, 모스크바 재판을 합리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게 정선생은, 자신의 관념 속에 자리 잡은 위대한 노동자 계급의 벗이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의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는 ‘비천한’ 노동자들의 벗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파리 한복판 생제르맹데프레의 고급 카페에 앉아서 중국의 문화혁명을 찬양했던 프랑스 지식인들의 모습에, 혁명에 환멸을 느끼자마자 이번에는 당찬 민족주의자로 선회해 드골주의의 품안으로 들어간 프랑스 지식인들의 모습에 정선생의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가 포개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결국 다시 정선생에 대해, 이번에는 고인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고 말았다. 그러나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물론, 여기저기 잡문을 흘리는 것으로 호구하는 나 자신에게 최우선적으로 돌려져야 할 말이다. 저 세상의 선생님이 평안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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