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는 시큰둥, 기업은 모르쇠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5.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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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시행 앞둔 퇴직연금제가 관심 못끄는 이유

 
한 대기업에서 9년째 근무하고 있는 최 아무개씨(40)는 요즘 퇴직연금제 때문에 좌불안석이다. 최씨는 내년 여름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밑천 삼아 새로운 일을 시작할 계획이다. 그가 퇴직 시점을 내년 6월 이후로 정한 까닭은 퇴직금 누진제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는 10년 이상 근무한 뒤 퇴직할 경우 퇴직금 누진제 혜택을 준다. 최씨의 경우 본인이 수령할 수 있는 퇴직금 외에 누진제 덕으로 웃돈 천만원을 더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최씨는 회사에서 퇴직연금제를 실시하면 그 ‘덤’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애가 타고 있다.

그러나 최씨의 걱정은 기우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퇴직연금제가 실시되어도 누진제를 시행하던 사업장의 경우 근로자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연금제도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용자의 부담률을 법정기여율보다 높게 책정하거나 퇴직연금제도 시행 이전에 가입한 것으로 보는 소급 적용 방법을 통해 자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최씨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더 큰 이유는 퇴직연금제가 예상보다 훨씬 더디게 도입될 가능성이 높아서이다. 퇴직연금제는 오는 12월1일부터 시행할 수 있지만 현재 도입 당사자인 기업과 근로자 모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근로자는 근로자대로 ‘퇴직연금제요?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반응이고, 기업들은 ‘글쎄요, 돌아가는 분위기 봐서…’라며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삼성·LG·현대자동차·KT·SK 그룹 등 주요 기업들이 퇴직연금제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알아보았지만, 하나같이 ‘노조(근로자)도 회사도 아직 큰 관심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민주노총이 지난 9월 100개 기업 노조를 대상으로 실시한 퇴직연금제 시행에 관한 설문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100개 기업 노조 가운데 3년 안에 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한 곳은 17개에 불과했다. 먼 훗날 도입할 계획이라고 답한 곳도 37개 노조였다. 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 노조가 29개, 잘 모르겠다고 답한 노조는 17개 노조였다. 더욱이 민주노총은 정부가 제시한 형태의 퇴직연금제는 당분간 도입하지 않겠다는 내부 방침까지 정해 놓은 상태다.  

퇴직금 보호 절실한 근로자는 되레 배제

그렇다면 제도를 만든 정부는 이 제도를 적극 권장하고 있을까. 재계나 노동계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퇴직연금제를 알리는 일에도 게으르고, 퇴직금 제도에서 연금제로 유도할 만한 유인책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 금융사 임원은 “정부가 퇴직연금제를 실시하겠다는 의지를 정말로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제도만 만들어 놓고, 당근도 주지 않고 채찍도 휘두르지 않은 채 ‘알아서 하라’는 듯한 태도다”라며 정부를 비판한다.

사실 근로자 처지에서 보면 퇴직연금제가 가진 장점은 많다. 퇴직연금이란 퇴직금을 한꺼번에 받는 것이 아니라 매년 생기는 퇴직금을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해 은퇴한 뒤에 연금 형태로 지급 받는 것을 말한다. 정부가 이 제도를 도입한 까닭은 근로자로 하여금 노후에 소득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연봉제가 확산되고 근속 연수가 단축되면서 많은 근로자들은 퇴직금을 소액 생활자금으로 써버려 노후 대책이 막막해졌다.

현행 퇴직금제도에서는 기업이 도산하면 근로자가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다반사로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행 제도에서는 퇴직금 적립과 운영을 기업의 자율에 맡기므로 회사가 장부상으로만 퇴직금을 적립해 놓고 실제로는 적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 회사가 부도 나면 근로자의 마지막 보루인 퇴직금마저 공중분해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이유로 근로자들이 못 받은 퇴직금 규모는 연간 1천5백억원이 넘는다.

그러나 퇴직연금제에서는 근로자의 퇴직금을 회사가 마음대로 ‘횡령’하는 것이 원천 차단된다. 예상 퇴직급여액의 일부(60%) 또는 전액을 매년 다른 금융기관에 의무적으로 적립해야 하기 때문에 회사가 문을 닫더라도 퇴직금만은 보호받을 수 있다. 또 적립된 퇴직금을 55세 이후부터는 연금 형태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노후 생활에 안정을 꾀할 수 있다(표 참조).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노동계와 근로자들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민주노총이 정부가 제시한 형태의 퇴직연금제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작 퇴직연금이 절실한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배제했기 때문이다(정부는 기업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에는 2010년부터 적용하도록 했다). 민주노총 정경은 정책부장은 “비정규직의 14%만 퇴직금을 받고, 퇴직금 체불액 비중이 가장 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배제된 상태에서 퇴직연금제를 실시하겠다는 정부 안은 퇴직연금제의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새로운 돈줄 잡자” 금융권 몸 달아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근로자들까지 이 제도에 무관심한 이유는 홍보 부족에 있다. 퇴직연금제가 한 달여 뒤면 시행된다는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이 제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근로자는 많지 않다. 샐러리맨들의 마지막 비상구인 퇴직금 문제가 목전에 와 있는데도 ‘밥상머리 화제’로조차 거론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홍보가 덜 되었다는 반증이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아예 마음놓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상황이다. 기업이 나서서 이 제도를 도입하게 하려면 ‘당근’을 주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기업을 유인할 만한 당근이 없다. 기업을 혹하게 할 가장 매력적인 당근은 세제 혜택인데, 현재 안대로라면 퇴직연금제를 도입하더라도 퇴직금 제도보다 더 나은 세제 혜택은 없다. KT의 한 관계자는 “기업 처지에서 볼 때 현행 퇴직금제도나 퇴직연금제도나 별반 다르지 않은데 구태여 도입할 필요가 있겠는가. 노조가 강력하게 요청한다면 그 때 가서야 검토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연합회에서도 기업의 재무부담 증가 등을 이유로 ‘속도조절론’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정부가 ‘제보다 젯밥’에 더 관심을 두고 퇴직연금제를 도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근로자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금융 시장을 활성화하려고 서둘러 도입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이나 호주 등 퇴직연금제를 도입한 나라들을 볼 때, 퇴직연금제가 도입되면서 금융 시장의 규모와 패러다임이 달라졌다. 현재 미국 금융 시장의 60%는 연금이 차지하고 있고, 20년째 퇴직연금제를 실시하고 있는 호주의 경우에도 퇴직연금 규모가 5백조원에 이른다. 선진국 시장들은 퇴직연금제가 실시되면서 증시가 급격히 발달했고, 금융 시장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런 이유로 퇴직연금제 도입을 결정할 당시 노동부보다 재경부가 더 적극적이었고, 금융권이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퇴직연금제 도입을 목전에 둔 요즘 몸이 달아오른 곳은 금융권뿐이다. 당장의 시장 규모만 12조원인 퇴직연금 시장은 2010년까지 시장 규모가 40조~60조 원으로 커질 전망이다. 금융권 처지에서는 노다지나 다름없는 시장이다. 그래서 보험사·은행·증권사 들은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문제는 당사자들은 새 제도를 계륵처럼 여기는데, 이 시장을 둘러싼 금융기관 간의 경쟁이 가열되면서 엉뚱한 이의 배만 불려줄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교보생명 박진호 상무는 “퇴직연금 문제는 19세기 말 쇄국정치를 결정할 때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는 것은 글로벌 트렌드여서 막거나 유보한다고 해서 멈춰질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 빨리 준비하지 않는다면 퇴직연금 시장에 대한 막강한 노하우와 탄탄한 자본을 가진 외국계 금융사 손으로 근로자들의 소중한 퇴직금이 놀아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라고 우려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입되면 퇴직연금이 운용되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리가 발생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증권산업노조 이정원 위원장은 “금융권에서는 적립식 펀드 계좌 하나만 유치해도 건당 2만원씩 수당을 주었다. 이 공식대로라면 그보다 더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모아주는 퇴직연금 담당자나 기업에는 얼마나 큰 인센티브를 주려 하겠는가. 엄청난 비리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걱정했다. 특히 시장을 공략하려는 금융사 처지에서는 노조가 없는 기업부터 먼저 공략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근로자보다는 회사에 유리한 방법으로 프로그램을 짜고 운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알고 미리 준비하는 길밖에 없다. ‘모르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야말로 퇴직연금제 시행을 앞둔 우리 사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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