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싸움에 ‘재벌 체제’ 등 터지나
  • 장영희 전문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5.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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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두산 수사’ 막바지 진입…쌍방 소득 없이 ‘자해’만 남을 듯

 
‘형제의 난’으로 불리는 두산 사태가 종착역을 향해 치닫고 있다. 10월20일 이 사건의 최고위 인사이자 핵심 ‘피의자’인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65·3남)이 소환되어 조사받은 것이다. 지난 7월 박용오 전 회장측이 박회장과 박용만 부회장 등이 두산그룹 위장 계열사를 통해 1천7백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검찰에 진정서를 낸 지 3개월 만이다.

물론 사법 처리 수위 및 대상자는 10월21일 현재 아직 유동적이다. 막판 변수도 생겼다. 검찰이 24일 박용오 전 회장(68·2남)을 1차 조사 때 진정인으로 부른 것과 달리 피고소인 자격으로 재소환해 보강 조사를 벌이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는 두산산업개발의 2천8백억원대 분식 회계에 관여한 혐의 등으로 박 전회장을 고발했었다.

하지만 검찰은 조사부 검사 6명 전원을 3개월간 투입한 결과 진정서의 비리 의혹을 상당 부분 규명해내는 수확을 올렸다. 사실 관계 추적 작업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검찰이 10월 말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는 계획을 밝힌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다.

과연 ‘용’자 돌림 두산가 3세대 전·현직 경영자 가운데 누가 사법 처리 선상에 오른 것일까.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이 조사받은 다음날인 21일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조사부 관계자는 사법 처리 수위와 대상자를 엿보게 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형제·부부 등을 동시에 구속하지 않는 수사 관행이 이번 사건에도 적용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적용된다’고 답한 것이다. 이 관계자는 구속 영장 청구 대상 및 규모와 관련해 ‘상식 선에서 국민이 납득할 정도는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정서의 비리 내용 상당 부분 규명

따라서 일단 두산그룹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50·5남)이 동시에 구속 기소되는, 두산으로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재계는 일단 박부회장에게 횡령 혹은 배임 혐의로 사전 구속 영장이 발부되리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그가 1995년 12월부터 그룹 기획조정실장·전략기획본부 사장 등을 맡으며 사실상 두산그룹을 총괄 경영해 왔기 때문이다. 

박부회장도 18일 검찰 소환 조사에서 ‘내가 알아서 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진술은 그가 이번 사안을 주도할 위치에 있기도 했지만, 형인 박회장에게까지 칼날이 겨누어지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로도 읽힌다. 하지만 여전히 박회장도 검찰의 '1인 구속' 방침에 해당되지 않는다도 할 수는 없다. 설령 구속되지 않는다 해도 기소 자체에서 벗어났다고 보는 것은 섣부르다. 불구속 기소될 가능성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박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아들인 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37)가 동현엔지니어링 등을 통해 조성한 비자금을 받아 사용했다는 등의 혐의를 일부 인정했다고 한다.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이 지금까지 총수 일가와 실무진 조사를 통해 박회장이 비자금 조성 등에 개입했다는 신빙성 있는 진술을 확보했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에 대해 제기된 의혹은 2백억원대 비자금 조성과 사용뿐만이 아니다. 박회장은 본인의 과실로 부도 난 그룹에 편입된 일경개발이 1백75억원을 분식한 것을 두산기업에 떠넘겼다는 진정 내용과 두산산업개발 분식 회계 에 관여했다는 참여연대 고발 사안에도 직접 관련되어 있다. 또 두산 계열사 지분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증권거래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는데, 검찰이 세무서 등에서 입수한 주식매매 자료 등을 들추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진정과 고발에서 적시된 두산가 비리 혐의를 규명하는 데 주력하고 있지만, 이 사건이 정치권으로 파급되는 것은 경계하는 흔적이 짙다. 비자금이 2002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인수할 때 정·관계 로비용으로 쓰였다거나, 박회장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선출 과정에 투입되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을 방침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해부하는 수사가 아니다. 두산 전체를 다 엎어서 하는 수사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오너 동반 퇴진→전문경영인 등장 가능성

따라서 검찰이 밝혀낸 2백억원대 비자금 조성과 두산산업개발이 총수 일가의 이자 대납을 위해 5년 동안 1백38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건 등을 누가 주도했느냐에 따라 사법 처리 수준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자금 사용과 관련해 두산가 3세대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박용곤 명예회장(73·장남)과 박용언(장녀)·박용현(4남)·박용욱(6남) 씨 역시 비자금 수혜자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용현씨(서울대 의대 교수)는 19일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생그룹 회장인 용욱씨는 비자금 수혜자를 넘어 조성자로 알려져 있어 박진원 상무와 함께 사법 처리 선상에 올라 있다.

결국 두산 형제의 난은 공격한 쪽이나 방어한 쪽이나 모두 전리품을 챙기지 못하는 패자전이 될 공산이 크다. 두산 사건을 보는 여론의 키워드가 족벌 체제에 대한 응징이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두산 사건을 관찰하는 포인트는 오너 가운데 누가 가장 무거운 벌을 받느냐, 얼마나 많은 형제가 사법 처리 대상자가 되느냐가 아니다. 두산 사건은 한국 재벌의 지배 구조에 일대 변화를 재촉하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1백9년간 이어져온 한국 최고(最古) 기업 두산그룹은 그동안 ‘공동 소유·공동 경영’ 원칙을 내세웠지만, 한쪽이 이탈하면서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앞으로 두산그룹은 어떻게 될까. 재계나 금융계 관계자들은 가족 경영과 가족회의라는 전근대적 의사 결정 구조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누가 살아 남든 오너 일가가 동반 퇴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오너들이 수습 주체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다시 말해 전문경영인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다. 두산그룹에는 이같은 전례가 있다. 1991년 두산전자가 페놀을 방류한 사건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두산은 박용곤 당시 회장이 물러나고 전문경영인 정수창씨를 회장으로 영입했던 적이 있었다. 

형제간 이해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계열 분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사실상 그룹이 없어지지 않겠느냐는 예측도 나온다. 물론 설령 오너들이 이렇게 합의한다고 해도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지배 구조가 두산중공업→두산산업개발→(주)두산으로 요약되는 순환 출자 사슬로 얽히고 설켜 있고, 오너 지분이 5~1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두산 사건은 한국 재벌의 지배 구조를 선진화하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폭풍 전야’만큼 지금 두산가가 처해 있는 상황을 잘 드러내는 말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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