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박근혜는 ‘이념의 칼’ 휘두르는가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5.10.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여름 ‘1차 정체성 투쟁’을 벌였다가 지지율이 17.6% 포인트나 하락했던 박근혜 대표가 ‘2차 정체성 투쟁’에 나섰다.
 
지난 10월18일 한나라당 긴급 기자회견장에 박근혜 대표가 검은색 바지와 벽돌색 재킷을 입고 나온 것을 두고, 언론에서는 ‘전투복’이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 박근혜 대표가 쏟아낸 말(“체제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겠다""국가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한나라당이 중심이 돼 국민과 함께 구국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다”)은 ‘초강수’였다. 박대표는 대통령의 정체성까지 묻고 나섰다.

이번 논란은 ‘국가 정체성 2라운드’에 해당한다. 박근혜 대표는 지난해 7월19일에 열린 전당대회에서도 대표최고위원 당선 수락 연설을 통해 “국가 정체성의 위기이고, 당력을 총집중해 흔들리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구국의 대열 선봉에 서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에는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NLL) 침범 사건에 대한 여권의 미지근한 대응, 빨치산 출신 인사들에 대한 민주화 기여 인정,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의 전력 등을 문제삼았다. 당시만 해도 박대표가 상생과 통합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부드러운 대여 관계를 강조해 왔다는 점에서 강성 발언이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국가 정체성 논쟁’은 그해 8월13일 ‘민생 경제 살리기’로 선회하기 전까지 근 한 달 동안 지속되었다.

1차 투쟁 결과는 박대표에게는 마이너스였다. 당시 이재오 의원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 세력으로부터 ‘여당의 2중대’니 ‘야성 상실’이니 하는 비판을 받아오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부단속용으로는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이지만 지지율은 급격히 감소했다. 국가 정체성 논쟁이 한창 진행되던 지난해 8월9일 리서치 앤 리서치는 ‘2004년 6월 조사에 비해 두 달 만에 박대표 지지도가 17.6% 포인트 하락했다’고 발표했다. 대중적 인기에는 나쁜 영향을 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1년3개월 만에 박근혜 대표는 국가 정체성 2라운드를 벌이고 있다. 지지율이 떨어진 경험이 있는데 그는 왜 ‘전투복’을 다시 꺼내 입은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10·26 재·보선’과 연관해 읽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이번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한 석이라도 잃으면 박대표의 지도력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고, 실제 선거전이 의외로 박빙 양상을 보이면서 박대표가 승부수를 띄웠다는 시각이다. 한 한나라당 의원은 “박대표로서는 양수겸장이다. 계속 정부·여당과 긴장 국면을 끌고 가면서 내부 지지층을 결집하면 선거에서 결과가 아주 나쁘지 않는 한 내부 분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강정구 교수 사건이 선거에 확실히 영향을 미쳤다. 후보들이 특별히 선거운동을 달리 한 것이 아닌데도 지지율이 올라섰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이명박 시장을 견제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한 당직자의 표현대로 ‘단일 이슈에 대해 이렇게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청계천으로 인해 최근 이명박 시장은 상당한 여론의 지지를 받아 왔다. 실제로 여론조사에서 그동안 부동의 1위를 차지해온 고 건씨를 제치거나 오차범위 내로 추격했다. 반면 박근혜 대표는 달리 국면을 전환할 만한 이슈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장외 투쟁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승부를 거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했겠지만 차별화를 위해 ‘정체성’ 카드로 ‘청계천 효과’를 상쇄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해석이다. 이번 기회에 이회창 전 총재와 연대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한나라당내 대선 주자들 간의 역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당내 비주류·소장파 대오가 이전에 비해 크게 흐트러져 있다는 점도 한 요인이다. 2차 정체성 논란이 제기되었는데도 현재까지 비주류·소장파는 가타부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비주류측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원심력보다 구심력이 더 크다”라고 말했다. 혁신위 안을 관철하지 못한 후 크게 위축되고, 또 김문수·이재오·홍준표 의원 등 핵심 인사들이 각각 내년 지방 선거 출마를 바라보면서 사이가 벌어지고 내부 동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0월19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국가 정체성 논란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은 고진화 의원이 유일하다. 수요모임도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나 입장 정리조차 하지 못했다. 이명박 시장과 손학규 지사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각을 세우기보다 원론적인 의사만을 내비치며 한 발짝 비켜나 있는 상태다.

장외투쟁·국보법 개폐 논란으로 확전 안될 듯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가 정체성 공세 2라운드에서는 ‘박근혜 대표가 그리 손해 볼 일이 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한귀영 연구실장도 단기적으로는 이번 ‘정체성 논란 2라운드’가 박근혜 대표에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전망했다. 지난 1차 정체성 논란 때에는 두 달 만에 지지율이 17%포인트가 빠졌지만 이번에는 박근혜 인기 상승 요인 가운데 하나였던 재·보선 변수가 있기 때문에 충분한 상쇄 현상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한귀영 실장은 “국보보안법 이슈는 기본적으로 한나라당 지지층을 결집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대표에게 불리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번 국가 정체성 2라운드가 장외 투쟁을 벌이거나 국보법 개폐 논란으로 확전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기자회견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장외 투쟁’을 의식해 ‘무한 투쟁’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기자회견 날 박대표가 아침에 ‘무한 투쟁이라고 하면 장외 투쟁을 연상하게 되잖아요’라면서 표현을 ‘구국운동’으로 직접 바꾸었다. 현재로서는 장외 투쟁 가능성은 별로 없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영남 보수파에 떠밀려 박대표가 불쑥 강공을 선택했고, 당 전체적으로는 전선을 조직적으로 확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박대표가 영남 강경파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재·보궐 선거에서는 반전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 처지에서 강력하게 투쟁하는 이미지를 보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번 국가 정체성 논란 때도 지지율이 하락했는데, 자칫하면 그동안 지녀온 ‘대화·타협’ 이미지가  일거에 뒤집힐 수 있다”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념 논쟁이 장기적으로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에게 득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더 많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한귀영 실장은 “안보 이슈를 지나치게 밀고 가면 한나라당의 외연을 확대하고 이미지를 바꾸는 데 걸림돌로 작용해 장기적으로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정체성 투쟁, 장기적으로는 손해볼 것”

물론 이런저런 정치적 해석에 대해 박대표 측은 그저 호사가들의 논평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한다. 특히 재·보선과 이명박 시장 지지율을 의식했다는 것은 박대표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는 주장이다. 한 당직자는 “이명박 시장을 의식한 것이라면 당 대표를 하면서 의원들 줄 세우기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또 재·보선 때문이라고 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정체성 논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박대표가 지원 유세를 나서면서 재·보선 여론조사는 유리하게 나왔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표와 가까운 한 관계자는 박대표의 화합 이미지와 강경한 리더 이미지가 충돌한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박대표의 화합·민생 이미지는 대선 때는 좋은 전략이다. 하지만 대선에 가기 위해서는 당내 경선을 통과해야 한다. 한나라당의 주 지지 기반은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 세력이므로 이들을 관리하고 단속해야 한다. 화합·민생 전략과 강경 전략을 오갈 수밖에 없다.”

정치권 안팎에는 10·26 재·보선을 전후해 국가 정체성 논란 2라운드가 잠잠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지만, 앞으로 논란이 어디로 튈지는 미지수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대정부 질문을 통해 ‘강정구 교수의 가족사’ 등 이슈를 계속 이어갈 가능성도 있다. 박근혜 대표가 뉴라이트 네트워크 집회에 참석했듯이 외부 보수 단체와 어떻게 연계할지도 변수이다. 제2의 국가 정체성 논쟁을 제기하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운 박근혜의 대차대조표는 결국 플러스가 될까, 마이너스가 될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