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만들기’기초 교육이 병들어 있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5.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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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만들기’기초 교육이 병들어 있다
의사 슈바이처는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라는 저서에서 자기가 왜 안온한 생활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오지로 향했는지 밝혔다. ‘나는 원시림에 사는 원주민들의 육체적 참상에 대한 기사를 읽었으며, 선교사들로부터 이야기도 들었따. 내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저 멀리 우리에게 도움을 호소히는 이 인도적인 문제에 대해 우리가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독일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교수직을 그만둔 슈바이처는 1905년 서른살에 의대에 입학하고 1913년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감동적 신화는 시작됐다.
 하지만 그가 만약 90년대 한국 땅에 살면서 그같은 인도주의적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의사가 되려 했다면 시작부터 좌절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먼저 치열한 경쟁, 그것도 수재들만 몰린다는 의대 입시 경쟁의 문턱에서 낙방했을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 의대에 입학했다 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동기들보다 열살 정도 늦게 대학에 들어간 그의 체력으로는 눈만 뜨면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학습량을 따라 가지 못해 탈락했을 수 있다. 또는 병원에서 임상은 배우지 못하고 예상 시험 문제인 이른바 ‘족보’만 달달 외는 현실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대학을 뛰쳐나갔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요행히 의대를 졸업했더라도 인턴 과정에서 일만 죽도록 하다가 아프리카로 갈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

공부에 내몰린 학부과정 “졸업 자체가 인간승리’
 한국 사회에 의대와 병원은 많아도 진정한 ‘의사 만들기’ 과정은 없다. 의대의 의예과 ․ 의학과등 ‘학부 교육’은 물론,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자격증을 딴 뒤 거치는 인턴 ․ 레지던트 과정 등 ‘졸업 후 교육’ 그리고 완숙한 경지에 이른 의사가 환자를 돌보는 틈틈이 참여하는 ‘평생 교육’등 그 어디에도 제구실을 하는 의사를 만들기 위한 체계적일 노력은 찾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구실’이라는 것은 의사의 본분인 일반 환자에 대한 진료와 치료를 뜻한다. 의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의학 지식도 하루가 다르게 새 내용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모든 것을 조합하고 소화해 국민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이바지해야 할 의사들은 왜곡된 의료 교육 체제의 현실 앞에 고뇌하며 갈수록 환자와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다. 이같은 ‘의사 만들기’ 환부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의대 교육이다.
 국내 대학에서 의대만큼 학생들에게 피땀 흘려가며 공부하기를 강요하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 먼저 교육 기간 자체가 다른 대학에 비해 2년 더 길다. 전통적인 의과대 교육 과정은 의예과 2년 ․ 의학과(본과) 4년을 합쳐 6년이다. 성적이 나쁘거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을 거르는 장치도 의대 교육의 강도를 남다르게 만든다. 재시험 제도와 유급 제도가 그것이다. 재시험 제도는 의대생이 수강한 한 과목의 학년말 성적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하는 제도이다. 유급 제도란 한 학년 동안 전체 수강 과목의 평균 성적이 일정 점수에 이르지 못하거나, 낙제한 과목이 하나라도 있을 경우 해당 학생이 이수한1년 동안의 교육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이다. 대한의학협회가 지난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내 의대의 의학과 학생 유급률은 최대치가 연간 17.2%에 이른다. 즉 의대생 백명 가운데 심한 경우 17명 이상이 유급 제도에 걸려 한 학년을 더 다니고 있는 셈이다.
 의대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너나없이 이같이 격한 의대 교육 체제의 부담을 털어 놓는다. 올해 충남대 의대를 졸업한 한 학생은 “의대생에 관한 한 무사히 졸업장을 받게 되는 것 하나만으로도 인간 승리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졸업 자체를 ‘인간 승리’ 라고 장담하며 대학문을 나서는 의대생도 막상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진정한 의사가 됐느냐’는 물음에는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 의대생들이 6~8년 이상 공부에 매달린 끝에 얻는 것은, 머리 속으로는 훤한데 손발이 따라 주지 않는 ‘껍데기 의학 지식’뿐이다. 한 의대생은 아예 “의대 공부는 인턴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다. 의사 자격증을 땄다고 해서 스스로 의사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남들도 의사로 인정해 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밝힌다.

과다한 학점에 허덕, 시험 땐 족보 판쳐
 모순은 의사 만들기의 첫 단계인 의예과 과정에서부터 출발한다. 본격적인 의학 공부의 예 비과정이라 할 의예과 교육이 의학과 연계되지 못하고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극히 적은 몇몇 의대를 제외하고 의예과는 아예 이공계 교육 과정에 흡수 ․ 편입되어 있다. 게다가 국내 의대 대부분은 의예과 학생을 가르칠 기초 학문 교수도 확보하지 못해 다른 대학 교수나 강사를 불러다가 강의를 맡기는 실정이다(아래 도표참조). 그러다 보니 가르치는 내용도 고등학교 수준과 별 차이가 없거나, 본과 공부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영남대 의대 졸업생 김상규씨는 “의예과 2학년 때 화학 분야 과목으로만 무려 여섯 과목을 들었지만, 그것이 과연 의사 자질을 키우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는 의대를 졸업한 지금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라고 털어놓는다.
 이런 모순은 의예과 학생들이 의학과로 올라간 뒤 더 심해지낟. 배워야 할 과목은 많은데 제대로 배울 만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다. 반면 의대생에게 가장 중요한 임상 교육은 형식에 그치고 만다. 현재 국내 의대 의학과에서 일반적으로 개설하고 있는 학과목 수는 평균 39개 정도이다. 그 중 의사가 일반 환자를 돌보는 데 꼭 필요한 이른바 ‘핵심 과목’ 은 내과학 ․ 외과학 ․ 소아과학 ․ 산부인과학 ․ 정신과학 등 다섯 과목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학부에서 배워도 그만 배우지 않아도 그만인 ‘특과 과목’ 이다. 하지만 아무리 비중이 적은 특과 과목이라도 학생들은 소홀히 할 수 없다. 특과 과목 대부분이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어 있고, 그 중에서 하나라도 F학점이 나오면 당장 재시험 또는 유급이라는 덫에 걸린다.
 의대 교육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족보’가 의대생 사이에 판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경 희대 의대를 졸업한 이상범씨는 “한 과목을 이수할 때마다 수천 쪽에 이르는 원서를 보게 된다. 책 한 권 보기도 어려운데, 시험 과목 수는 많다보니 공부하기 편한 족보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족보만 들여다보는 일도 간단치가 않다. 선배들로부터 후배에게 대물림되면서 족보의 분량도 해마다 늘어난다. 기말 고사나 학년말 시험 때에는 족보만 따로 뽑아도 A4 복사용지로 수천 쪽이 된다”고 말한다.
  대학에 따라 사정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의대에서 이수해야 할 학점은 지나치게 많다(아래 도표 참조). 심지어 어떤 의대의 경우는 의학과 4년간 무려 2백39 학점을 이수하라고 학생에게 강요한다. 수업시간으로 따지면 7천 시간을 헤아리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각 의대 의학부장회의(학장회의)는 의대 수업 시간을 통산 4천 4백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2백 시간 정도 가감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의학과 수업 시간이 4천5백~5천 시간 이상이 되면, 대학 수업은 학생의 자율 학습을 기대할 수 없게 되고 교수의 강의 위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본 의학계에서는 통설로 되어 있다.

자격증 따기 교육…임상 실습은 뒷전
 한국 의과대의 학점이나 수업량이 늘어난 까닭은 주로 의학 분야가 세분화하면서 가르쳐야 할 내용이 더 많아졌다는 데 있다. 하지만 교수들 간의 자존심 다툼이라는 의외의 요소가 개입되기도 한다. 한 의대생은 “특과 과목을 가르치는 한 교수가 재시험을 높이면, 다른 특과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도 틀림없이 재시험률을 높인다. ‘아무개 선생이 가르치는 것만 중요하고 내가 가르치는 과목은 과목이 아니냐’면서 학생들에게 ‘본때’를 보이는 것이다. 학생들은 그 과목 학점이 비록 0.5학점에 불과해도 밤을 새워 공부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는 사이에 ‘의사 만들기’ 과정은 큰 타격을 받는다. 의대생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실습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기초 의학 과목 가운데 해부학 실습 과정이 두드러진 예이다. 가르치는 교수에게나 배우는 학생에게나 해부한 실습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이 크지만, 국내 의대의 태반은 해부학 실습 내용 면에 서 취약함을 변치 못하고 있다. 영남대 의대생  김상규씨는 “말이 실습이지 그저 해부하는 광경을 지켜본다고 하는 표현이 알맞다. 어떤 대학은 학생 수가 워낙 많아 30조씩 조를 나눠, 한 조가 실습하는 동안 다른 조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식으로 운영한다. 조건이 좋은 대학을 제외하고 이같은 현상은 의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주로 의학과 3~4학년 과정에서 진행되는 임상 실습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원래 의학과 교육은 1~2학년 때 이론을 3~4학년 때 임상을 배우게 되어 있다. 미국 의대는 3~4학년 과정 전체를 아예 임상 실습에 할애한다. 하지만 국내 현실은 다르다. 32개 의대 가운데 3학년 1학기부터 4학년 2학기까지 학생들에게 임상 실습을 시키는 대학은 두 곳밖에 안된다. 반면 3학년 2학기부터 4학년 1학까지로 임상 실습 기간을 정한 의대는 19개 대학에 이른다(왼쪽 도표 참조). 임상 실습을 4학년 1학기에 끝내는 까닭이 학생들에게 인턴 시험과 의사 자격 시험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은 의대생 사이에 공공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실습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들여다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실습 나간 학생들이 병원에서 배우는 일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기술이 아니라, 실습 시간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때울 수 있는가 하는 요령이다. 부산  인제의대 졸업생 박상운씨는 “때때로 선배들이 환자의 병력을 조사하고 이학적 검사를 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극히 운이 좋은 경워다. 실습은 그저 출석 여부를 점검하는 것 정도로 끝난다. 의대 졸업생 대다수가 갖은 고생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환자를 대하면 망연해 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의학 교육의 왜곡된 모습은 의대생들이 의사자격증을 딴 뒤부터 시작되는 ‘졸업 후 교육’ 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대학에서 습득했어야 할 실전 지식이 없으니, 의대 졸업생들이 실기를 배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 자격증만 딴 의사들을 아예 의사로 쳐 주지도 않는 사회적 분위기도 왜곡 현상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 결과 현장에 들어가야 할 의사들은 이른바 인턴 ․ 레지던트를 받아들이는 곳은 대학 부속 병원 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종합 병원이다. 하지만 이 병원들은 예외 없이 환자들로 넘쳐나 ‘일손이 모자란다’고 매일 아우성치는 곳들이다. 사실상 이들 병원은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받아들여 의사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 운영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값싼 인력’으로 고용하는 것이다(52쪽 기사 참조).
 전문가들은 ‘의사 만들기’ 과정이 파행으로 치닫게 된 근본 원인이 의학 교육, 특히 의대 교육의 목표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의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반 환자를 치료할 능력이 있는 ‘1차 진료 의사’를 양성 ․ 배출하는 데 있음에도, 의료계 전체가 이같은 사실을 망각하거나 일부러 외면해 왔다는 것이다. 한국의학교육학회 최삼섭 교수(이화여대 의대 ․ 예방의학과)는 “문제는 의대 교육이 강의실과 대학 병원에서만 이뤄진다는 점이다. 진정한 의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의대 교육의 장이 강의실과 실습실은 물론 지역 사회 의료시설과 현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돈 버는 기술 가르치는 학교로 전락’
 대학과 병원 주변만 맴도는 의학 교육의 폐해는 ‘의료 서비스 수준’과 직결되는 의료 전달 체계에 악영향을 미친다. 의대 졸업생 전체의 90% 이상이 전문의로 몰리면서 의사 수와 환자 수 간에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전체 의사 가운데 일반 환자를 치료하는 1차 진료의가 70%, 전문 과목만 따로 보는 전문의가 30%일 때 비로소 의료 전달 체계가 균형을 이룬다고 말한다. 전체 환자 80% 이상은 1차 진료의가 치료할 비교적 가벼운 질병으로 의사를 찾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지난해 대한의학협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직 의사 5만5천여 명 가운데 일반의는 21.7%인  1만2천여 명에 불과하다. 전문의 대부분이 전문 과목과는 상관 없는 환자에 매달리고, 환자는 환자대로 자기를치료할 의사가 없어 병원에서 하루 종일 차례를 기다리는 모순이 이 때문에 빚어진다.
 의사들은, 비정상적 의료 전달 체계의 밑바닥에는 현실을 무시한 의료 수가 체계, 무조건 큰 병원만 선호하는 잘못된 국민 의식이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양심적인 의사들마저도 자기네가 일부 수술을 기피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과잉 진료를 하는 원인은 잘못된 의료 수가 체계에 있다며 개선을 호소한다. 종합 병원이나 대학 부속 병원에서 환자가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입원실이 모자라 응급실까지 병실화하는 등 폐해가 발생하는 까닭이, 동네 병원은 제쳐두고 종합 병원으로 먼저 달려가는 환자들의 태도에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궁극적인 책임을 다시 의사와, 의사 양성의 임무를 맡은 의학 교육자 그리고 병원에 돌아간다. 유승흠 교수(연세대 의대 ․ 예방의학)는 “지금 대부분의 대학 병원은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단지 돈을 버는 곳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의대도 의술이 아니라 돈 버는 기술을 습득하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 의학 교육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라고 말한다.
 국민들은 의학 교육 정상화를 통해 빈사 상태에 빠진 의료계의 인도주의가 소생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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