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대통령선거 이후 광주는 ‘침묵’에 빠졌었다. 선거 이야기는 물론 정치 이야기 자체를 입에 올리기 싫어했다. 당시
<시사저널> 커버 스토리(93년 1월28일 ․ 2월4일 합병호)는 광주의 정서를 이렇게 옮겨 놓았다.
‘계층에 따라
표현은 다르지만 광주시민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절망감인 것 같다. 지역간의 머릿수로 대통령이 결정되는 풍토라면 투표를 하느니 아이를 많이
낳는 게 낫다는 자조적인 얘기가 유행한다.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다수결에 대해서 광주시민들은 회의를 느끼는 것이다.’
광주에서
유행한 ‘자조적인 얘기’는 근거가 없지 않았다. 당시 커버스토리 관련 좌담기사에서도 조희연 교수(성공회신학대 ․ 사회학)가 지적한 김영삼 후보의
승리 요인은 지역성에 의한 몰표와 도시 중산층의 보수화였다. 특히 조 교수는 김영삼 ․ 김대중 후보의 표 차이(1백90여만표)와 영 ․ 호남
유권자 수(4백90만 대 3백50만명)를 근거로, 1백90만표는 그 4분의 3이 지역성에 의한 몰표, 나머지는 50여만표는전국적인 보수화 현상에
의한 득표였다고 진단했다. 또 윤구병 교수(충북대 ․ 철학)는 만일 호남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덧 씌워진 지역감정에 사로잡혀 허무주의나 패배주의에
장기간 빠지면 지극히 비이성적인 반응을 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가령 롯데와 해태가 프로 야구 경기를 하는데 심판 판정이 잘못됐을때 경기 이
난장판이 되도록 분노한다는지 하는 이성이 배제된 행위가 표출되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지금
광주는 주광역시가 되었지만 광주 ․ 전남지역 인구가 갑자기 늘었다는 통계는 나오지 않고 있다. 전남 지역 인구는 이농 현상과 경제 침체를 반영한
듯 더 줄어들었다. 또 롯데 대 해태전에서 난장판이 벌어진 적도 없었다. 오히려 시들해진 해태팬의 무관심 탓인지 지난 2년새 ‘막강 해태’의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서울대 합격률 3년 연속 ‘우등’
그 대신 광주 ․ 전남지역 주민들을 기쁘게 한 것은 이
지역 학생들이 받은 ‘성적표’이다. 지난 2년 간의 성적표에 고무된 광주지역의 한 신문은 아예 사설 제목을 ‘실력 광주… 또 해냈다’라고
달았다. 지난 1월27일 발표된 95학년도 서울대 입시 결과를 두고 한 말이었다.
서울대 입시 총합격자 5천45명 중에서 광주
지역 합격자는 3백55명(전체 합격자의 7%)으 로 서울(2천1백57명 ․ 43%)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같은 성적은 광주보다 인구가 훨씬
더 많은 부산(3백25명 6.4%), 대구(3백7명 ․ 6.1%), 인천(1백67명 ․ 3.3%)등에 견주면 놀라운 ‘실력’이다.
더욱이 이 지역 재학생수와 대비한 합격률로 보면 광주의 합격률(1.5%)은 서울의 그것 (1.29%)을 크게 앞질러 명실공히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이같은 합격률은 부산(0.54%) 등 다른 9도시에 견주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성적이다. 더구나 광주는 ‘3년 연속
1등’ 을 차지했다. 이같은 성적은, 지난해 이 지역 재학생수가 3천5백명이나 감소된 절대적 경쟁 여건의 불리함과 전국의 각 시 ․ 도가 광주를
따라잡기 위해 견학단을 파견하는 등 안간힘을 썼던 치열한 경쟁 상황을 감안할 때 더욱 돋보인다.
최근 사상의 초유의 무더기
탈락 사태로 파란을 몰고온 올해 의사국가시험에서 전남대 의대가 합격률 81.2%를 기록해 서울대 의대(76%), 경북대 의대(69.9%)등을
제치고 7개 국립대 가운데 1위를 차지한 것도 이 지역 주민들을 고무시킨 또 하나의 사례다.
전남도, 2004년까지 육성기금 3백억원 모금
이 지역에 불고 있는 새로운 변화의 기운을
가속화하는 또 다른 현상은 지역 대학과 지방자치 단체가 인재 육성과 지역 발전을 위해 취하고 있는 ‘공동보조’이다. 지난2월10일 이 지역의
중심 대학인 전남대가 지방대학으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만한 내용의 ‘지역인재육성책’ (29쪽 기사 참조)을 발표하자 조규하 전남도지사가 그날 즉시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적극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은 지역 인재 육성에 대한 대학당국과 지방자치단체의 공감대가 이미 형성돼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전남도는 이날 전남대가 밝힌 특례입학제가 실현될 경우 전남대가 지역 총생산액에 미치는 효과를 매년 3천5백억원
수준으로 계상해, 이 수치의 3%선인 1백억원을 매년 전남대 발전기금으로 출연하기로 했다.
또 조규하 지사 부임 이후 전남도가
장기사업으로 펼치고 있는 ‘전남 인재 육성기금 조성’ 사업은 지난해 12월 관련 조례안이 도의회를 통과함으로써 사업 추진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올해부터 2004년까지 기금 3백억원 확보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이 사업은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지방자치단체
자체 사업이라는 점에서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호응이 매우 높다. 전남도는 이미 조성된 ‘종잣돈’ 20억원에 도 및 시 ․ 군의 출연금, 기금의
운용으로 발생한 수익금, 기타 출연금과 보조금 등을 더해 목표액을 조성해 나갈 계획이다. 백도선 전남도, 기획담당관은 이에 대해 ‘지역 인재
육성이 절실하고 절박한 과제라는 점은 오래 전부터 도민들 사이에 폭넓게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조규하 지사가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전남도는 지역 대학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대기업이 대학발전기금을 기부 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지난 해 포항제철 광양제철소에서 인근 순천대에 1백 l억원이라는 거액의 발전기금을 쾌척한 것도 이런 노력의 결실인
셈이다. 백 담당관은 “인재 육성에 대한 전남도민들의 의지를 포항제철이 수용한 결과이다. 대기업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큰 명분도 사실 지역
인재 육성에 대한 이 지역 도민의 열망이다”라고 말했다.
전남도가 광주시와 함께 펼치고 있는 인재육성 사업 가운데, 이 지역
출신의 서울 유학생들을 위한 남도학숙(위 기사 참조)에 이어 추진하고 있는 전남 일대의 섬이나 농어촌 학생들을 위한 전남학숙 건립 사업도
지방자치단체로서는 획기적인 일로 평가되고 있다. 총 사업비 52억원이 투입되는 전남학숙은 목포 ․ 순천 ․ 여수에 각 1개씩 건립돼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이 지역 학생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공간’을 제공할 것으로 인다.
도 차원의 사업과는 별개로 도내 각 시 ․
군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이른바 ‘인재 가꾸기 사업’도 이 지역에 불고 있는 새로운 기운의 바람이다. 비교적 군세가 센 완도군의 경우
20억원을 목표로 지난해부터 ‘완도장학진흥기금’을 조성중인데 현재 17억원을 모았다. 완도 군은 또 군 단위로는 유일하게 낙도
학생들을 위한 청해학숙을 완도읍에 건립중이다. 한편 군세가 약한 곡성군의 경우에도 오는 98년까지 10억원을 목표로 지난해부터 ‘내 고장 인재
육성을 위한 장학진흥기금’ 조성을 시작했다. 이같은 자치단체의 자체 장학기금 조성 노력은 도내 모든 시 ․ 군 전역에서 지역 주민들과 출향
인사들의 호응에 힘입어 ‘예상밖의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민간 차원의 장학사업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공부는 새로운 투쟁 방법
전남도의 경우, 94년 한해 동안 6개의 장학재단이 공익법인으로
등록을 마쳤고, 광주시 관내에서는 12개의 장학재단이 신규로 등록했다. “전국에서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광주 ․ 전남 지역의 재정 자립도나
경제 규모를 볼 때 관민을 통틀어 지역 인사들의 장학사업에 대한 열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라는 교육청 관계자들의 말은 이 지역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 걸고 있는 ‘희망’ 을 잘 드러내준다. 그 희망은 필연적으로 투자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교육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유치원에서 대학을 졸업할때까지 드는 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평균 5천7백 11만원이다. 그런데 전국 15개
시 ․ 도별 학생 1인당 교육비 수준을 보면 전남이 시 ․ 도를 통틀어 전체 1위이고, 광주 또한 서울을 포함한 6개 특별 ․ 직할시 중에서
1위(전체 6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곧 광주 ․ 전남지역의 인재 육성을 위한 허리띠를 졸라맨투자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만하다.
임복진 의원(광주 남구)은 이 지역의 새로운 변화의 바람에 대해 “5.18 이후 덧씌워진 멍에 속에서 80년대 해태 프로야구에
쏟았던 애정을 92년 대선에서 쓰라린 경험을 겪고서부터는 이제 인재 육성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광주의 경우 인재
육성만큼은 여야와 제도 ․ 비제도권을 떠나서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분명한 것은 침묵으로 저항했던 쪽으로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