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맨은 람보, 삼성 맨은 007?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5.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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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영학회 5대 그룹 기업문화 … 신념․업무 태도 차이 확인

현대그룹 임원들은 ‘마패’만 있으면 뭐든 못할 일이 없었다. 정주영 전 명예 회장의 친필 사인이 바로 그 마패였다. 정씨는 그룹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답게 결정도 신속했다 어떤 사업은 책임지고 있는 임원이 올린 서류를 보고 괜찮은 사업이라고 판단하면, 즉시 서류 한 켠에 ‘   ’자를 흘려 쓰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면 만사 오케이. 그 서류를 쥐어든 임원은 거칠 것 없이 일을 추진하면 그만이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그것은 분가피한 일일 뿐이었다.
 반면에 삼성그룹 임원들은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은 보고와 결재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상급 임원들에게 책잡히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기획하고, 꼼꼼하게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과정을 소홀히 했다간 해당 사업은 없는 일이고 말았다. 일 처리는 더뎠지만, 있을 수 있는 시행착오를 미리 줄일 수 있었다.
 이처럼 현대그룹과 삼성그룹 임원들의 일 처리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각각의 의사결정 구조에 익숙한 사원들 역시 입원들과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고 여겨져 왔다. 현대 그룹 구성원들은 단순하고 저돌적이며, 삼성은 꼼꼼하고 신중하다고.
 과연 현대 사람들은 람보형이며, 삼성 사람들은 제임스 본드형 인가. LG, 대우 ․ 선경 ․ 그룹 사람들은 또 이들에 비해 어떨까. 아니 과연 이 5대 그룹 사원들은 다른 그룹 사원들과 구분할 수 있는 기질을 갖고 있기나 할까.
경영학자들의 모임인 한국경영학회(회장 황일청)는 지난해 7월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런 통 념에 도전해 왔다.
 서울대 경영학과 신유근 교수 외에 5명의 젊은 경영학 교수들이 참여한 ‘한국 대기업의 경영 특성’에 관한 연구가 그것이다. 이 연구는 한국 주요 기업들의 특성을 서로 비교한다는 점에서 가업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LG전자 · 대우중공업 사원 상대적으로 “평범”
 연구 대상 기업들은 삼성물산 ․ 현대자동차 ․ G전자(금성사의 새로운 이름),  대우중공업 ․ 선경인더스 트리 등 5대 그룹의 주력 기업이나 모기업이면서, 섬유 ․ 전자 ․ 자동차 ․ 중공업 ․ 무역과 같은 한국의 대표적인 업종에 속한 기업들이다. 이 기업 직원에 대한 방대한 설문조사와 인터뷰, 관찰 등을 통해 각 기업의 경영전략 ․ 마케팅관리 ․ 경영조직 ․ 인력관리 ․ 기업문화 차원에서 나타나는 강점과 약점, 관행들을 발굴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경영학회 예산 외에 각 기업들로부터 똑같은 금액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는 이 연구의 결과는 4월 경 공식 발표된다. 이 연구들 가운데 조영호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가 전담한 기업문화 비교는 앞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비교적 명쾌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니까이 연구는 각기업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관을 찾아내 이를 비교한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5대 그룹에 대해 꼈던 선입견들은 대개 옳았다.
 우선 5대 그룹의 전형적인 사원상은 어떨까, 현실적이어서 안정을 중시하며, 낙천적이고 윤리 의식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 5대 그룹은 다른 그룹에 비해 상당히 강한 기업문화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5대 그룹사원들은 다른 그룹 사원들에 비해 일부 규범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래야 한다는 강한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어 상사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계획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 근무중 개인적인 업무를 봐선 안된다, 사람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회사에 대해 나쁘게 얘기해서는 안된다 등이 그런 항목이었다. 
 대표적인 사원의 성격은 각 기업 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이미지와 별반 차이가 없다. 삼성물산 사원이 가장 튄다면, 현대자동차와 선경인더스트리는 다소 특이하다. 반면 LG전자와 대우중공업은 가장 평범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물산 사원의 성격은 상대적으로 지적이고 치밀하며, 윤리 의식이 강하고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모험을 추구하는 형이다( 93년 새로이 제정되기 전의 경영 이념과 사원 정신은 합리주의 ․ 완벽 주의 ․ 도덕성 동을 포함하고 있었다). 반면 현대 자동차 사원은 삼성물산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들은 감정적이고 단순하며, 대범하고 임기응변에 강하다. 선경인더스트리 사원들은 상대적으로 내성적이고 겸손하며, 마음이 여리고 안정을 중시한다.
 5개 그룹 가운데서도 삼성물산과 현대자동차의 문화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삼성물산 직원들은 여러 가지 공식적 사인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이들은 복장이 깔끔해야 한다든지 계획이 철저해야 한다는 등의 규범에 크게 집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규범에 대한 의식이 가장 약한 기업은 현대자동차였다. 규범의 내용이 주로 철저함과 정형성이 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두 회사간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적으로부터 배우기’ 필요
 다만 현대자동차의 경우i 다른 회사에 지면 안 된다는 의식만큼은 어느 회사보다 강했다. 또 철저함과 정형성을 거부하는 회사답게 이 회사는 비공식주의가 가장 높았다. 비공식주의란 일을 처리할 때 공식적인 절차를 얼마나 중시하느냐에 관한 태도를 말한다. 비공식주의가 높다는 얘기는 일을 처리할 때 공식적인 절차를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상사의 사적인 지사를 받아들일 것인가, 혈연 ․ 학연 ․ 지연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인간 관계를 위해서 규정이 희생돼도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대 사원들이 가장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는 뜻이다. 이 회사 사원들은 또한 !한이 집중돼 있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경영관에 대해서도 다른 회사 사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
다.   
 LG그룹 사원들의 가장 독특한 성향으로는 혁신주의가 꼽혔다. 혁신주의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 ․ 자동화 등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능력주의를 얼마나 선호하느냐, 개방과 개혁에 대해 얼마나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느냐와 관련된 것이다. 또 이 그룹 직원들은 전문경영 체제에 대한 선호도가 특히 높아, 90년 이후 그룹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경영혁신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G그룹은 다른 그룹보다 비교적 빨리 주요 사업 단위 별로 전문경영체제를 도입했다.
 그 동안 극히 대조적인 삼성과 현대의 기질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이 점은 이번 연구에서도 크게 부각됐다. 이 연구를 담당한 조영호 교수는 삼성의 문화적 특성을 아폴론적 문화에 비유했고, 현대를 디오니소스적인 문화에 가깝다고 했다. 전자는 질서와 의식, 제도를 중시하고 후자는 그보다는 개인적인 감정을 쫓는 문화다.
 이런 구분은 <국화와 칼>이라는 책으로 이름난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덕트가 미국의 인디언 부족에 대해 연구하면서 고안해 낸 것이다.
 두 유형의 기업 문화는 특유의 딜레마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아폴론적인 기업문화는 동적이 다이내믹한 기업 행동을 방해하고, 디오니소적인 문화는 질서 있고 안정적인 행동을 가로 막는다. 두 그룹에 한때 유행어가 됐던 ‘적으로부터 배우기’가 정말로 필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크게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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