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못지 않은 ‘서른 두 글자’의 비밀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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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학술대회에서 한·중·일 학자 ‘대토론’

 
우선 가벼운 에피소드 하나. 11월 초 고구려연구회가 주최한 광개토대왕비 관련 국제 학술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서영수 회장(단국대 교수)과 만났을 때다. 마침 한 방송사에서 서교수에게 생방송 인터뷰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 전화선 너머로 들리는 아나운서의 첫 말이 이랬다. “조작설 등 해석이 분분한···.” 일본이 비석을 조작해 역사를 날조했다는 ‘신화’는 한국인들에게 여전한 상식이다.

말 나온 김에 11월3일 학술대회장에서 벌어진 촌극을 하나 더 소개한다. 하마다 고사쿠 교수(일본 규슈 대학)의 발표가 끝난 직후 플로어에서 노신사 한 사람이 발언권을 얻어 일어섰다. “왜가 한반도 남쪽을 지배했다는 것은 날조다. 일본 사학자들은 반성하고 공부를 다시 하라.” 학술 행사 취재를 자주 다니지만, 고구려 관련 학술대회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 재야 사학자들이 다수 참가하며, 논쟁에 끼어드는 일도 잦다. 동북공정 논란이 한창일 때도 그랬다. 학술 행사가 민족 혹은 국가 자존심을 다투는 자리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수능 시험을 치르는 마음으로 한문 문장 하나 들여다보자.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광개토대왕비 1면에 새겨져 있는 이른바 신묘년 기사 대목이다. 역사상 이 서른두 자만큼 많은 논쟁을 부른 문장은 없었다. 1883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소속 밀정  사코 가게아키(酒?景信)가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서 탁본을 입수해 일본으로 가져간 지 1백20년이 지났지만 여전하다. 4~5세기 고구려와 백제·신라·왜 사이의 국제 관계가 들어 있어서다. ‘□□’는 완전 유실되어 해독이 불가능한 부분이다. 나머지 글자 중에도 학자에 따라 판독이 다르거나 불분명한 글자가 섞여 있다. 

1889년 일본에서 간행된 <회여록>에 실린 서른두 자에 대한 최초 해석은 이렇다. ‘백잔·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391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해석은 국내 학계에서 ‘일본 통설’로 불린다. 통설은 이후 50년 이상 정설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일본 패망과 함께 ‘해석의 자유 시대’가 도래한다. 스타트를 끊은 이가 위당 정인보. 위당은 주인공에게 불리한 내용이 비문에 적힐 리 없으며, 따라서 주어나 목적어가 생략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위당이 주어나 목적어를 적당히 보충해 넣어 해석한 문장은 이렇다.

‘왜는 일찍이 신묘년에 (고구려에 가서 침범하고 고구려도 또) 바다를 건너 (왜를) 무찌르고, 백잔은 (왜와) 내통하여 신라를 침범했다. (태왕은) 신민(인 백잔과 신라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고구려나 왕을 주어로 보충하는 방식은,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북한의 김석형과 박시영에게 이어졌다. 최근까지도 박진석 옌볜 대학 교수가 이 방식을 계승했다.

한편에서 통설을 뒤집으려는 다른 시도가 있었다. 아직까지 위력을 발휘하는 ‘조작설’이다. 학술적으로 처음 제기한 이가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다.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비석에 석회를 바르는 등 비석 자체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1972년 이씨는 이른바 ‘석회도포작전’을 서술한 논문을 발표해, 일본 고대사학계를 발칵 뒤집어엎었다. 한국 학계가 광개토대왕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일본의 비문 조작설, 사실과 달라

결론부터 말하면 이씨의 조작설은 현재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씨의 공이 있다. 텍스트 자체에 대한 연구를 촉발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코본이 원석 탁본이 아님이 밝혀졌다. 사코본은 쌍구가묵본(종이를 대고 글씨의 테두리를 그려낸 뒤 글씨 바깥을 먹으로 채우는 기법) 혹은 묵수곽전본(원석 탁본 위에 종이를 대고 그려내는 기법)으로 불린다. 그리고 사코본과 동시대에 제작된 원석 탁본 12종과 수많은 묵본들이 새로 발견되었다. 1890년대 중반 이후 비석에 석회를 바른 후 탁본했다는 사실도 드러났지만, ‘참모본부의 작전’이 아니고 깨끗한 탁본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럼 국사학계의 태도는? 정인보식 ‘주어 생략론’과 이진희식 ‘비문 변조론’이 절반씩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형구 교수(선문대)는 서른두 자 중에서 ‘왜(倭)’자를 ‘후(後)’를 변조한 것으로, ‘래도해(來渡海)’를 ‘부공인(不貢因)’을 변조한 것으로 본다. 이교수의 해석은 이렇다. ‘신묘년 이후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왕이) 백제와 왜구와 신라를 파하여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

서영수 교수는 ‘해(海)’자를 ‘왕(王)’을 변조한 것으로 본다. 또한 ‘□□’ 속에는 ‘왜항(倭降)’이라는 문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서교수의 해석은 이렇다. ‘왜가 신묘년에 무엄하게 건너왔기 때문에 왕이 백잔과 왜는 공파하고 신라는 신민으로 삼았다.’

‘해(海)’자는 서른두 자 중에서 논란이 가장 많은 글자다.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는 해를 ‘사(泗)’로 보며, 중국의 겅톄화(耿鐵華) 퉁화사범대 교수는 해를 ‘매(每)’로 본다.

완젠췬(王健群) 등 중국 학자들은 대체로 일본의 통설을 따르는 편이다. 한문 문장으로만 보자면 통설의 해석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비문의 내용과 역사적 사실은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원수 사이였던 백제를 능멸하기 위해 ‘백잔(百殘)’이라고 표현했듯, 왕의 무훈을 강조하기 위해 왜의 힘을 과장했다는 해석도 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광개토대왕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밝혀졌다. 발견 당시 비석은 이끼로 가득 덮여 있어서 탁본 자체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말똥을 덮고 불을 질러 이끼를 제거했는데, 그 과정에서 비가 갈라지는 등 훼손되었다. 풍화와 침식으로 표면이 거칠어져 글씨 판별이 어려운 점도 글씨 판독 논쟁을 부르는 주요 원인의 하나이다.

11월3~5일 단국대에서 열린 ‘광개토대왕과 동아시아 세계’ 학술대회는 최근의 광개토대왕비 논의를 종합하는 자리였다. 쉬젠신(徐建新)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과 가오밍스(高明士) 타이완 대학 교수가 사코본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탁본을 공개하는 등 열기를 피웠다. 하지만 이번 역시 차이를 확인하고 자기 주장만 하던 예전과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현재 1천7백75자 가운데 논란이 없는 글자는 73%인 1천3백1자에 불과하다. 3백19자는 해석이 엇갈리며, 1백7자는 파독 자체가 불가능하다. 비석의 전체적인 상태에 비하면 서른두 자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그럼에도 논쟁은 오직 이 대목에서만 벌어진다. 학술대회장에서 만난 고구려연구재단 임기환 연구기획실장은 “광개토대왕비 연구는 마치 현대사를 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라고 말했는데, 현실을 꼬집는 자탄처럼 들렸다.

국사학계 일부에서는 최신 레이저 기술을 이용하면 비문 내용을 모두 복원할 수도 있으리라는 말이 오간다. 하지만 현대의 한·일 관계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고대사를 해석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광개토대왕비의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학술대회를 참관하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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