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흐를수록 부푸는 의혹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5.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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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858기 사건 후 18년 흘렀으나 밝혀진 것 없어

 
1987년 11월29일 오후 2시1분.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858기가 인도양 안다만 상공에서 사라졌다. 정부는 ‘88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북한의 특수 공작원 김현희와 김승일이 저지른 폭탄 테러였다’고 서둘러 발표했다. 대선 하루 전날인 12월15일 김현희씨는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사 1개월 만에 김현희씨는 자기가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KAL기 폭파범이라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형 선고, 특별 사면, 결혼…. 그리고 김현희씨는 종적을 감추었다.

사고가 난 지 어언 18년. 이제는 잊힐 만도 하다. 하지만 KAL기에 대한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 있다. 희생자 가족들은 유족이라는 말도 거부하고 있다. 스스로를 ‘가족회’로 부른다. ‘KAL 858기 가족회’ 차옥정 회장은 “시신 한 구, 유품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유족이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라고 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족문제연구소·천주교인권위원회·통일연대 등도 한 달에 한 번꼴로 KAL기 사건에 대한 공청회를 열고 있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사건의 진실이 가려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문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국정원측은 ‘사소한 실수다’ ‘기억의 착오다’ ‘수사가 미흡했으나 수사 결과 발표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논리는 무너졌다. 과거사를 정리하겠다며 국정원에서 발족한 진실규명위원회도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또 검찰은 기록을 공개하라는 재판에서 두 번이나 지고서도 기록 공개를 꺼리고 있다. 의문은 이제 확실한 가설이 되었다.

김현희가 북한 사람이 아니라면?
성명:김현희
생년월일:1962. 1. 27
주민등록번호:없음
직업:북한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2과 소속 공작원
주거:평양시 문수구역 문수1동 65반 무역부아파트 7층 1호
출생지: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
당시 공판 조서에 기재된 김현희씨(43)의 인적 사항이다. 평양시 문수구역은 1982년에 신설되었다가 1984년 폐지된 행정구역이다. 1987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김현희씨는 1980년 대남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집을 나와 초대소 생활을 시작했다.

이른바 ‘칼귀 논쟁’으로 유명한 김현희씨의 화동(花童) 사진에 관한 진술도 앞뒤가 안 맞는다. 재판 당시 검사가 제시한 사진 두 장을 보고 김현희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진들은 피고인의 집에 있는 사진의 모습과 분명히 같으며, 앞에 있는 어린이가 그때 피고인과 함께 참여한 동무가 틀림없습니다.” 사진은 곧 거짓으로 밝혀졌다. 김현희가 자기라고 지목한 사진 속 위에 선 소녀의 귀가 김현희의 귀와 생김새가 크게 달랐던 것이다(칼귀 논쟁). 어린 시절 사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혼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자살한 김승일씨(당시 73세) 부분도 의문이다. 안기부는 김씨가 고령이지만 4개국어에 능통한 전자 기술 전문가여서 특수 임무에 기용되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시체를 부검한 국과수의 발표에 따르면, 김승일씨는 위를 거의 대부분 절재한 중환자 노인이었다. 북한이 건강이 극도로 나쁜 요원을 테러 행위에 차출했다는 것도 납득되지 않는다. 일본 기자들은 김승일씨가 영어조차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김현희, 간첩인가?
안기부 발표에 의하면, 김현희씨는 7년 8개월간 해외특수공작원 훈련을 받았다. 그 중 3년 4개월간은 특수 폭파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김현희씨는 기본적인 폭약의 이름조차 몰랐다.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라’는 명령을 받은 김현희씨 일행은, 1987년 11월12일 평양을 출발해 소련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 비엔나, 유고 베오그라드를 통해 이라크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김현희씨와 김승일씨는 가는 도시마다 사진을 찍고 쇼핑을 했다.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헝가리 부다페스트 북한의 비밀 아지트 전화번호는 유치원 전화번호이고, 김현희씨가 묵었다는 베오그라드 메트로폴리탄호텔 603호실은 회사 사무실이었다.

김현희 소지품에서 발견된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호텔 메모지는 1984년 것이었다. 소지한 일제 담배는 1983년 생산된 제품이고, 묵었다는 호텔도 다르다. <KBS 스페셜 - KAL 858기의 미스터리>를 연출한 류지열 PD는 “1987년 이전에 김현희가 우리 정보기관에 포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KLA기 사건을 우리 정부가 조작한 것이라면) 안기부가 옛날부터 모아온 정보력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미 노출된 공작원을 KAL기 사건에 써먹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비행기 폭파 이후 특수공작원의 행적은 삼류 스파이 영화보다 더 허술하다. 운명의 11월29일, 김현희 일행은 우발적으로 바레인으로 갔다. 아부다비에서 중동·아프리카·유럽 등 탈출하기 쉬운 곳으로 갈 만한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여기에서도 폭파범 일행은 여유를 부렸다. 바레인에서 사흘째 되는 날 떠나기로 하고는 항구·공원·시내를 돌아다니며 쇼핑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비밀공작원이 이동한 곳마다 자신의 행적을 증거로 남겼다. 배낭 여행객이 가는 곳마다 기념 사진을 남긴 것 같다.
김정기 당시 주바레인 한국대사는 사건 다음날인 11월30일 호텔 방으로 김씨 일행을 찾아갔다. 일본대사관측도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김현희씨는 도주하기는커녕 “내일 떠나면 된다”라는 말을 했다. 항공기 폭파범 일행은 체포 당시 조선노동당원증은 물론 김정일에 대한 충성맹세문까지 지니고 있었다. 납득하기 어렵다.

KAL기 정말 폭발했는가?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폭파에 사용한 폭탄은 라디오 안에 숨겨온 콤퍼지션C4 350g과 술병에 담아온 PLX 액체 폭약 700cc이다. 당시 잔해 분석을 담당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총기분석실장에 의하면 사고기 잔해에서 폭발물에 의한 폭파흔적이 전혀 없었다. 김현희씨와 김승일씨가 체포될 때 입었던 옷에서는 TNT 성분이 검출되었다.

 
KAL 858기 폭파테러용 폭약을 감정한 심동수 동아대 겸임교수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심교수는 “(두 폭발물의) 폭발력은 수류탄 3개 위력 정도로 항공기를 산산 조각내기는 어렵다. C4가 터지면서 액체 폭약이 같이 터져야 하는데 두 폭약의 성질이 다르면 하나가 터져도 다른 것은 안 터진다”라고 설명했다. 일본 아사히TV가 방송한 특집 다큐멘터리 <김현희 17년의 진실>에서 미국의 폭파 분석 전문가 로버트 박사는 실험을 통해 “당시와 똑같은 상황을 설정했을 때 기체를 산산조각 내려면 김현희가 말한 것보다 3배 더 많은 양의 폭탄이 필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국정원측은 여러 의혹들을 인정하면서도 본질이 바뀌는 사안들이 아니라면서 전면 재조사는 하지 않겠다고 한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수지 김 사건이 우리의 조작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KAL기 사건처럼 100명이 넘는 생명을 놓고 공작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사고 당시 안기부 고위 관계자는 “한 사람을 납치한다면 모를까, 항공기 한 대를 날리면서 완벽하게 공작을 수행할 능력은 없다. 안기부 실력 밖의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미국의 정보기관이 도와주었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최근 오충일 국정원 진실규명위원회 위원장은 “국정원의 과거사 문제 가운데 KAL기 폭파 사건이 가장 어렵다”라고 말했다. 진실규명위원회의 한 위원은 “김현희씨가 진술을 거부하고 있는 것보다 국정원 수사국 내에서 협조하지 않고 있어 진전이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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