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지식 사회 횡단기
  • 이문재(시인, 출판저널리스트) ()
  • 승인 2005.11.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담>/인문학자 도정일·생물학자 최재천의 대화록

 
첫 격돌은 124쪽에서 벌어졌다. 두 학자의 삶과 사유의 구비를 소개하는 지면(‘두 지성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다’)을 통과해 63쪽에서야 처음 인사를 나누었으니, 예열하는 시간이 좀 길었던 것이다. 문화와 과학의 수인사는, 기초 학문에 대한 홀대가 극심하며, 학문과 학문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이 완강하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생명과 인간, 문화와 사회를 바라보는 렌즈는 많이 달랐다. 차이가 두터웠다. 이윽고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가 정면 충돌했다. 최재천 교수가 ‘인간에게 비생물학적 차원은 없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도정일 교수가 발끈했다. “그 발언은 생물학을 대변하기 위해 인문학의 코털을 건드리는, 아니 건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잡아 뽑는 중대 발언이 됩니다. 계속 코털을 잡아 뽑을 겁니까?” 그러나 최교수는 한 걸음 물러서면서도 칼자루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생물학자의 처지에서 보면, 비생물학적 차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담의 초입은 아슬아슬했다.

경희대 영문과 도정일 교수와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가 나눈 길고 넓고 깊은  대화가 <대담>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휴머니스트 펴냄). 두 학자는 2001년 12월 처음 만난 이래 여덟 번 얼굴을 맞댔고, 대담 진행을 맡은 젊은 지식인(고병권·이승원·정여울)들로부터 각각 두 차례씩 질문을 받는 자리를 가졌다. 그러고 나서도 두 학자는 1년 넘게 대화 내용을 수정, 보완한 끝에 지난 11월 중순 책을 펴냈으니, 그야말로 ‘구라의 대장정’이었다(대담 중반부에 두 학자는 문학과 과학을 구라로 보았고, 서로를 구라라고 인정하는 눈치였다. 도구라와 최구라의 구랏발!).

 
두 학자는 각자 분야에서 뚜렷한 성취를 일군 ‘대표 선수’들이다. 도정일 교수는 1980년대 후반, 50대에 접어들어서야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늦깎이 문학 평론가이지만, 비평 이론에서부터 현장 비평, 신화학, 서사학은 물론 사회 문화 전반에서 요동하는 반문화적 작태를 예리하면서도 경쾌하게 해부하는 글을 쓰는 한편, 문화운동과 시민운동을 병행했다. 문화연대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기적의 도서관’을 기획하고 감독했고, 요즘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북스타트 운동을 지휘하고 있다.

새로운 세기는 생물학의 시대

최재천 교수는 동물행동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힌다. 개미와 같은 사회성 곤충을 비롯해 까치·조랑말·박쥐 등을 관찰하며 사회 구조, 성의 생태, 인간 두뇌의 진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과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을 과학화하기 위해 활발히 저술 활동을 펼쳐온 그는 <개미제국의 발견>과 <곤충과 거미류의 사회 행동의 진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열대 예찬> 등 책을 여러 권 펴냈다.

 
<대담>이 갖고 있는 의미와 그 효과는 중층적이다. 무엇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다. 두 학자가 구강이 건조해지도록 지적했듯이, 이 땅의 지식인 사회는 ‘남의 땅(시쳇말로 밥그릇)을 넘보지 말라’는 금기에 매우 충실하다. 이 책은 저 단단한 금기를 뒤흔든다. 새로운 세기는 생물학의 세기이거니와 예술과 종교와 사회과학을 포함하는 인문학은 과학의 전위인 생물학과 대화(통섭)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척점에 있는 두 학자(학문)의 대화는 학문과 학문 사이에 세워져 있는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아니 문을 내는 것이었다(모든 문은 벽에다 내는 것이다. 벽이 없으면 문도 없다). <대담>이 만들어놓은 문을 가장 먼저 통과해야 할 사람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문학자들이다. 인문학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현실과 담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두 학자가 지적했듯이 인문학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통역’이 필요한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문을 열고 드나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대담>이 학자들만을 위한 논의는 아니다. 만인을 위한 교양 서적으로도 손색이 없다. 두 학자는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신화, 종교, 철학, 문학, 과학, 기술 등 이성과 상상력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인간과 문화를 전방위에서 조명한다. 수능과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은 물론 대학생들에게도 권하고 싶다(당연히 전공 불문).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흥미진진한 지적 순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 “<대담>아, 놀자”.

이 책은 기획과 편집의 승리이기도 하다. 대담집은 출판사(편집자)가 죽어나는 만큼 독자가 즐거워지는 고약한 장르이다. 적합한 대담자를 선정해 섭외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진행하고 편집하기도 만만치 않다. 말이 쉬워 ‘적합한’ 대담자이지, 적합한 인물은 고집이 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축에 드는 까다로운 사람들이다. 풍요한 지식의 향연을 베풀고 있는 <대담>은 (독자들 눈에는 잘 띄지 않겠지만) 기획과 편집의 위력을 새삼 증명하고 있다. 반갑다, <대담>아.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