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스토리 인 뉴욕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5.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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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은 재벌 3세 사교장

 
11월23일 저녁, 미국 뉴저지 주 포트리에 있는 한 아파트 주차장에 벤츠 자가용이 하나 둘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젊은이들은 20대 초반이었고, 남자는 검은 파티 정장을 입고 여성은 가슴이 팬 드레스에 진주 등으로 장식한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아파트 고층의 한 저택에 모인 사람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창문 밖으로 허드슨 강이 흘렀고 멀리 뉴욕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내다보였다.


11월23일은 미국의 추석이라는 추수감사절이었다. 뉴욕 인근에 유학 중인 대학생들은 으레 간단한 파티를 하는 날이다. 하지만 이 파티에 모인 참석자들은 보통 유학생과는 배경이 달랐다. 모임을 주최한 호스트는 ㄷ그룹 한 유력 인사의 외손자였고, 그 밖에 ㅈ일보 사주의 친척 딸, ㅈ일보 가문의 자제, ㅇ건설 오너의 손자 등이 참석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놀았지만 주로 초대된 피아니스트의 음악을 듣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파티가 시내 프라이빗클럽이 아니라 개인 집에서 여렸기 때문에 유달리 조용히 진행된 편이다”라고 한 파티 참석자는 전했다.

최고 화제는 이건희 회장 딸 사망 사건

이 날 파티의 최고 화제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셋째 딸 윤형씨 사망 사건이었다. 참석자들은  “이해가 안 돼... 왜 그렇게 서둘러 장례를 했을까?”라며 갸웃거렸다. 윤형씨는 뉴욕 한복판 맨해튼에 있는 뉴욕 대학에 연수 중이었다. 윤형씨는 11월19일 뉴욕 인근 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에 자택에서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윽고 파티의 화제는 뉴욕 유학생들의 신변 잡담으로 이어졌다. 물론 연애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뉴욕에 유학하는 유력 가문 여성 아무개가 평소 한국에 있는 재벌가 남성 홍 아무개를 좋아했는데, 마침 홍이 뉴욕으로 유학을 왔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연애 사업은 당장 파티 현장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ㅈ일보 조카딸은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뭇 남성의 눈길을 받았다. 참석자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친한 학교 친구도 있었다.
‘재벌 앤드 더 시티’. 재벌 3세들의 최고 사교장은 강남 압구정동이 아니라 뉴욕 맨해튼이다. 혼기가 찬 20대 초반 재벌 3·4세들이 모두 뉴욕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재벌 자녀 간에 벌어지는 연애나 결혼 혹은 이른바 ‘썸씽’도 서울이 아니라 바로 ‘뉴욕 연애 시장’에서 이루어진다.


 
지난 6월30일 결혼한 두산그룹 가문 박서원씨(26)와 LS그룹 가문 구원희씨(25)의 경우도 그랬다(사진 참조). 박서원씨는 박용만 두산그룹 부회장의 장남이고 구원희씨는 구자철 한성(LS가문) 사장의 외동딸이다. 두 사람이 결혼에 골인한 데는 양가 부모의 오랜 친분도 있었지만, 마침 두 사람이 미국 동부에 가까이 붙은 대학을 다닌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뉴욕이 재벌 자녀의 데이트 코스가 된 첫 번째 이유는 여성 유학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재벌가 남자들이야 수십 년 전부터 미국 동부지역으로 유학을 많이 왔지만, 재벌가 여성들이 아이비리그 문을 두드린 것은 최근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삼성그룹의 경우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60)와 장녀 이부진씨(35)가 유학을 가기 전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차녀 이서현씨(32)부터는 결혼 전에 유학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씨는 서울예고를 졸업한 뒤 미국에 가서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사망한 셋째 딸 이윤형씨(26)도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갔다.

재벌가 여성들이 좋아하는 대학 집중

현재 30대 재벌 3·4세 가운데 나이가 20세~25세이면서 미국 동부 대학에 적을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20세~25세  여성의 경우는 90% 이상이 뉴욕 인근 소재 대학에 다니고 있다. 지난 11월24일 월간지 <포브스 코리아>는 주식 자산 가치를 기준으로 ‘한국 여성 부호 순위’를 발표했다. 이 표에 따르면 25세 이하 여성 부자 순위 1위는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의 차녀 임상민씨(25)로 6백22억원대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대상그룹 최대 주주인 임씨는 현재 뉴욕대학에 다닌다. 여성 부호 순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장녀(20)도 뉴욕에 있다.


재벌가 남성들이 캘리포니아나 보스턴 소재 대학에 흩어져 있는 데 비해 여성의 경우 유독 뉴욕이라는 특정 도시에 몰려 있는 점이 흥미롭다. 파슨스·SVA·플렛처럼 미술·패션 대학이 뉴욕에 소재해 있는데, 재벌가 여성들은 대부분 이런 전공을 택한다. 뉴욕의 재벌가 여성을 만나기 위해 주말이 되면 보스턴에서 달려오는 재벌가 남성이 많다. 차로 3~4시간 거리다. 몇몇 재벌가 자녀의 홈페이지에는 뉴욕 생활에 대한 동경을 엿볼 수 있다. ‘정말 보고 싶은 덴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없고. 오늘은 뮤지컬도 봤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냥 랜덤하게 티켓 구해 봤는데 너무나 재밌게 봤다. 뉴욕 와서 이렇게 좋을 줄 진짜 몰랐다’(LG그룹 구 아무개씨 홈페이지, 2004년 11월).

뉴욕에서 로맨스가 꽃피는 두 번째 이유는 결혼 문화의 변화다. “요즘에는 부모가 억지로 혼맥을 맺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기들끼리 서로 친하고 좋아서 결혼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름 있는 집 자녀라면 어차피 같은 학교나 같은 동네에 있으면서 대부분 얼굴 정도는 알게 된다.” 현재 서울에 체류하고 있는 한 대기업 오너 2세가 설명하는 요즘 재벌가 결혼 풍속도다. 부모 처지에서는 자연스럽게 혼맥을 잇기 위해서라도 자녀들을 뉴욕으로 보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 재벌가 남성은 “여성들의 경우 한국에서 일이 없이 놀고 있다는 눈치를 보기 싫어서 일단 유학을 핑계로 미국 대학에 학적만 올려놓고 몇 년씩 쇼핑을 즐기다가 오는 사례도 많다”라고 비판했다.

인기 드라마 <파리의 연인><프라하의 연인>에서는 유럽 도시에서 만난 재벌가, 유력가 자녀와 평민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로맨스를 꿈꾸고 있다면 파리나 프라하가 아니라 뉴욕으로 갈 일이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서울에 재벌 2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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