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놀아야 제대로 배우지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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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윤구병과 ‘B급 좌파’ 김규항이 이색 어린이 잡지 만드는 까닭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지금 초등학생 또래 아이를 가진 이들이라면 한때 열광했을 이름이다. 어린이 잡지가 종적을 감춘 지도 20년. 한동안 일본풍 만화 잡지들이 명맥을 잇더니, 요즘은 그도 뜸하다. 서점가에 어린이용 잡지들이 10여종 있지만, 대부분 학습지 성격의 것들이다. 그래서 더했을 것이다. 12월1일 창간한 <개똥이네 놀이터>(보리)를 뒤적거리며 가슴이 찡했다. 2년 전 <고래가 그랬어>(야간비행)가 창간되었을 때도 비슷했다. 두 월간 잡지는 발행처나 내용 모두 다르지만, 여러 면에서 닮았다.

 
‘B급 좌파’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칼럼니스트 김규항씨(44)가 2년 전 어린이 잡지를 낸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놀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삐딱한’ 글들이 주가를 높일 때였지만, 그는 오히려 회의가 들곤 했다. “자기 삶에 익숙해진 어른들한테 내 글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에 불과했다. 집에 들어가서 공부밖에 할 게 없는 아이들을 보면 또 미안해지고.” 그런 그의 ‘386 증후군’이 <고래가 그랬어>라는 독특한 어린이 잡지를 만들게 이끌었다.

2003년 10월 창간되어 현재 26호까지 나온 <고래가 그랬어>는 초등학생을 겨냥해 만든 만화 잡지다. 하지만 ‘겨우 만화’라고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2백여 쪽짜리 책 곳곳에 인권·전쟁·생태 같은 진지한 소재를 다룬 읽을거리가 빼곡하다. 요새 인기 연재물은 생태 만화 <더럽게 살자>. 이번호에서는 조류 독감과 지구의 환경 문제를 다루었다. 일선 초등학생들을 섭외해 주제를 주고 토론시킨 뒤 그대로 싣는 <고래 토론>과 전태일의 어린 시절을 극화로 꾸민 <태일이>도 잘 읽힌다. 김규항씨와 미디어 전문가 김창남 교수(성공회대) 등은 짤막한 글을 연재한다. 인권운동사랑방과 함께 기획한 <뚝딱뚝딱 인권짓기>는 1년 연재된 끝에 얼마 전 책으로 묶여 나왔다.  

 
“<고래가 그랬어>는 의식화 교재나 아이들한테 뭘 가르쳐 보자는 책이 아니다”라고 김규항씨는 말한다. 책을 본 반응은 제각각이다. 잡지를 단체로 본 서울 시내 한 사립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햄버거를 거부한 일이 있었고, 학생들을 의식화한다는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도 여러 차례 받았다.

<고래가 그랬어>는 우여곡절 끝에 창간되었다. 원래 <튼튼 영어>를 펴내는 유니북스 박명신 사장이 유니북스에 다니던 ‘회사원 철학자’ 강유원씨로부터 김규항씨를 소개받고, 조건 없는 후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창간을 석 달 앞두고 박사장이 급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후원자 없이 잡지를 내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어서, 작가들에게 원망 듣지 않고 결호 한 번 없이 책을 펴내느라 발행인 김규항씨와 출판사 야간비행의 조대연 대표(41)는 2년째 월급 한푼 가져가지 못했다.

2년째 월급 한푼 못가져 가기도

이들에게 최근 ‘고래동무’라는 후원 그룹이 생겼다. 영화 제작자 이 은씨가 총대를 멨고, 안상수(그래픽 디자이너)·김동원(영화 감독)·권해효(탤런트)·정혜신(정신과 의사)·김어준(딴지일보 총수) 씨 등이 함께하고 있다. 고래동무는 지방의 초등학교와 공부방 등에 <고래가 그랬어>를 무료로 보내는 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이들은 12월8일 첫 모임을 연다.

 
최근 창간된 <개똥이네 놀이터>도 <고래가 그랬어>처럼 기존 학습지류 잡지들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월간지다. <개똥이네 놀이터>의 산파역은 ‘농사꾼’ 윤구병씨다. 10여 년 전 충북대 철학과 교수 직을 내던지고 홀연히 전북 변산으로 내려간 윤씨는 그동안 ‘변산 공동체’를 이루어 농사를 지으면서 어린이 책을 기획해 왔다. “이오덕 선생이 생전에 이런 잡지를 내고 싶어했다.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고자 2년간 준비한 끝에 창간에 이르렀다”라고 그는 말했다.

<고래가 그랬어>에 비하면 <개똥이네 놀이터>는 좀더 수월하게 세상에 안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이 책을 오랫동안 만들어온 보리출판사가 펴내며, 어린이도서연구회·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생태유아공동체 같은 진보 성향 단체들이 창간 준비에서부터 기획 과정에까지 깊이 참여했다. ‘아이살림생명살림’ 코너에 생태유아공동체의 주장과 성과가 담기거나, 이호철·윤태규·박선미 씨 등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들이 필자로 참가한다. 신옥희 편집인(41)은 “그렇다고 <개똥이네 놀이터>가 교육적 효과를 위한 잡지는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충분히 놀 수 있어야 건강한 감수성과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창간호에는 눈에 띄는 연재물이 여럿 보인다. 동화작가 권정생씨가 몇년 만에 장편 동화 연재를 시작했다. <랑랑별 때때롱>은 아홉 살짜리 지구 아이와 별나라 아이가 만나서 같이 노는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판타지 동화다. 만화가 이희재씨도 10년 만에 만화 연재를 재개했다. 아이들이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지은 글을 그대로 실어 보여주는 것은 우리말 연구가이자 아동 문학가였던 이오덕씨가 생전에 하던 방식 그대로다.

 
<개똥이네 놀이터>의 창간 준비기간 가제는 ‘어린이’였다. ‘어린이’는 소파 방정환이 1930년대 만든 최초의 어린이 잡지 이름이다. 논의 끝에 <개똥이네 놀이터>로 결정했다. “출세 일변도의 교육을 생각하는 다수 학부모들에게 아이들을 키우는 다른 방식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생각했다”라고 신옥희 편집인은 말했다. <개똥이네 놀이터>와 <개똥이네 집>이라는 어른용 월간지를 한 세트로 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래가 그랬어> 또한 이름이 범상치 않다.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우연히 지은 이름이지만, 나름으로 뜻을 해석해 담았다. 제호의 고래는 바다에 사는 포유동물이 아니라 어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고래가 그랬어>의 표지 어디에도 고래 그림이 없다. 대신 제호 옆에 ‘언제나 누구나 즐겁게’라고 적혀 있다.

<개똥이네 놀이터>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1~3학년을 주 대상으로 한다면 <고래가 그랬어>는 초등학교 4~6학년에 맞춘 책이다. 두 책 모두 제호에서 연상되듯 공부보다는 ‘공부 외의 것’을 더 강조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윤구병씨는 <고래가 그랬어> 창간 당시 편집자문위원으로 도움을 주었다. <개똥이네 놀이터> 편집진은 창간 준비 과정에서 김규항·조대연씨를 만나 경험을 전수했다.

윤구병씨는 “아이들도 자기들만의 문화가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말자. 아이들이 자기 눈높이에 맞춰 놀고 즐기면서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돕자”라고 말했다. 김규항씨도 “<고래가 그랬어>는 인권과 생태를 주로 다루고, <개똥이네 놀이터>는 인간과 자연의 상생에 중점을 두고 있다. 두 잡지의 지향점은 서로 같다”라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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