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올해의 인물' 소신의 나팔수, 이문옥
  • 金東銑 편집부국장 ()
  • 승인 1990.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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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위상정립 위해 ‘사실’ 밝힌 용기 높이 평가

 
이문옥 전감사관은 90년 5월11일 23개 재벌계열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이 43.3%라는 감사원의 ‘감사자료’를 언론에 제보하여 은행감독원이 발표한 30대 재벌 5백20개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이 1.2%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 폭로는 재벌의 땅투기에 대한 사회의 경각심을 다시 불러일으켰고, 감사원의 독립성에 대한 문제를 극명하게 제기했다. 《시사저널》은 이것이 6ㆍ29이후 폭발했던 언론ㆍ사법ㆍ노동ㆍ학원 등 우리사회 각계의 자율성과 독립성 요구ㆍ획득과 맥을 같이 하는 민주화 흐름의 중요한 궤적의 하나라고 판단하여 문제를 제기한 이문옥 전감사관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의 행위에 대한 법적 심판은 아직 미결상태이나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진실’을 밝힌 그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지난 5월 이문옥 감사관이 ‘23개 재벌 계열사 비업무용 부동산이 43.3%’라는 감사자료를 <한겨레신문>에 제보하여 직무상 기밀누설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항간의 반응은 크게 보아 두 갈래였다. 주로 관변을 중심으로 한 사회 일각에서는 폭로의 동기 자체를 불순하게 해석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양심적 공직자의 출현’에 박수를 보냈다. 비판적 시각을 대변하는 것은 역시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 내용이었다.

 “피의자 이문옥은…89년 7월경 상사의 명에 따라 국세청을 대상으로 한 한일개발 등 23개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과세실태 감사반의 반장으로서…8월16일부터 감사를 실시하다가, 과잉감사로 물의를 빚지 말라는 주의를 받고…12월27일 감사교육실 교수담당관실로 전보되자 인사에 불만을 품고…5월5일11시경…한겨레신문에…사본1부를 건네주어…법령에 의한 직무상 비밀을 누설한자로서 구속치 않으면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자임.” 이 감사관의 폭로동기를 ‘인사불만’으로 보는 시각은 이후 이감사관의 태도를 공직자 기강 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매도했다.

땅투기 풍조 속 “터질 것이 터졌다”
반면 이감사관의 폭로에 박수를 보낸 사람들은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었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런 여론을 대변하여 “이번 사건은 재벌 땅투기를 봉쇄하겠다는 정부 의지가 대국민 무마용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현집권세력이 재벌들을 비호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실로 입증한 또 하나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와같이 양극을 달리는 시각이 대립되는 가운데, 일반 국민의 궁금증은 또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30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을 해온 사람이, 더욱이 오직 가정의 안정을 바라는 나아인 50을 넘어선 마당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구속까지 각오하는 행위를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의감의 발로인가. 혈기왕성한 청년도 아닌 장년의 나이에 정의감 때문에 구속까지 각오할 수 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소박한 의문을 한번쯤 가져보았을 것이다. 기자도 마음 한구석에 이런 궁금증을 깔고 그의 고향 성묘길에 따라나섰다.

 
구속 당시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비친 이감사관의 얼굴 인상은 어딘지 날카롭고 깐깐한 것이었다. 특히 수갑을 차고 수사관들에 의해 서대문 구치소로 압송될 때 입을 굳게 다문 그의 표정은 칼날 같은 인상이었다.

열차 식당차에서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금방 그가 매우 부드럽고 순진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웃을 때는 신문에 났던 사진과는 전혀 딴판으로 매서운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열차 속에서 ‘오늘의 이문옥’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가족관계, 유년시절, 공직생활에 대해서 집중 취재했는데, 그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그는 星州 이씨 李鍾洙(71년 작고)씨와 宋榮任(88년 작고)씨 사이에서 1937년 7월27일(음력)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나주읍 다시면 백동, 형제는 8남매. 그의 부모는 딸 여섯을 낳은 뒤 절에 공양을 드리고 장날에는 떡을 해 많은 사람들에게 적선을 한 끝에 간신히 아들 문옥을 얻었다.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백동은 마을 앞으로 평야가 펼쳐져 매우 살기 좋은 곳이었으나 마을 바로 옆에 저수지가 생기는 바람에 그의 집 농토가 수몰지구가 돼 그가 세살 때 인근 왕곡면 송죽리로 이사했다. 그래서 그의 성장지는 송죽리의 달이골.

나주 금성산(4백51m) 줄기에서 뻗어난 산봉우리 다섯개로 둘러싸인 달이골은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이 나주 목사로 있을 때 이곳을 지나가다 ‘雲中微月’이라고 읊었다 해서 마을 이름이 월곡이 됐고, 이것이 우리말로 풀이돼 달이골로도 불리고 있다. 또 이곳은 명당이 많다 하여 예로부터 전국 풍수들이 주목했던 곳이다. 이문옥씨도 어렸을 때 풍수들이 찾아와 자기 집에서 자주 묵고 간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집 농토는 논 열마지기와 밭이 약간 있었으므로 말 그대로 빈농이었다. 열 식구가 이 농토에 의지하고 살았으므로 살림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집에서 10리 떨어진 왕곡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유년시절의 기억은 뚜렷한 것이 없다. 달이골에는 모두 4가구가 살고 있었으므로 생활 자체가 워낙 단조로웠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제 때 공출을 피해 부모들이 쌀을 산속에 숨기로 다닌 것이라든지, 자유당 때 말단 관리들의 행패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농지세ㆍ소득세를 매길 때 농사를 많이 지은 사람이 ‘힘이 있는 사람’과 연결하여 적게 물고, 농사를 적게 지은 사람이 많이 지은 사람과 같게 물거나 오히려 많이 물어 그는 겨울철만 되면 부모들이 대단히 속상해 하는 것을 목격하며 자랐다. 부모들이 이런 것에 대해 이장에게 불만을 터뜨리면 잔치 때 세무서 직원을 보내 술 빚은 것을 ‘적발’하려 한다든지, 나무를 안 땔 수 없는 실정인데도 산림계 직원을 보내 나무 땐 것을 시비하여 괴로움을 주는 게 다반사였다.

 그는 중학교 때 세무서 직원 집에 가본 일이 있었는데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관리들의 이런 비리를 보며 막연히 “이래서는 안되는데”하고 생각했는데, 이 말은 감사원에서 근무하면서 ‘성역’에 부딪혀 감사가 제대로 안될 때도 내뱉은 말이었다.

 이문옥씨는 왕곡국민학교에서 줄곧 전교 1등을 했다. 그래서 졸업식 날에는 최고상인 도지사상을 받을 줄 알고 설레는 마음으로 졸업식장에 갔는데 1등상은 엉뚱하게도 담임선생과 같은 마을에 사는 아이에게 돌아갔다. 선생이 그애에게 점수를 더 주어 석차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1등을 도둑맞은 국민학교 졸업식은 그의 유년시절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산골에서 자란 순박한 소년이 이때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분노가 그의 마음 깊숙이 새겨놓은 상처는 이후 공정치 못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반발해온 근원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어요. 2등에게 나보다 1점을 더주어 석차를 바꾸어버렸거든요. 그래서 국민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는데, 이게 어떤 징크스가 됐는지 중학교에서는 내내 2등밖에 못했어요.”

 나주 금천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그의 부모는 가정형편 때문에 그에게 학업을 더 계속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자신도 그 형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호남의 명문이었던 광주고등학교에 시험이라도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을 버릴 수 없어 바로 위 누님에게만 말하고 부모 몰래 광주에 나가 시험을 보았다. 합격이 되어도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지만 시험만은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인데, 용케 합격했다.

 
이 합격은 이웃 마을에까지 화제가 되었고 마을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야단이었다. 이웃 마을까지 통틀어 광주고 합격자는 그 혼자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경사 분위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하는 수 없이 그를 광주고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그의 고교 진학으로 동생 東玉씨는 국민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보다 네 살 아래인 동옥씨는 전기통신공사에서 근무하다가 80년에 미국으로 이민갔다.

 이문옥씨는 광주에서 자취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은 보통. 겸손한 말인지는 몰라도 그는 머리 좋은 학생들이 많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59년에 보통고시에 합격했고, 군복무를 마친 뒤 63년에 총무처로 발령받아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정보부 요원 앞에서도 당당

 나주평야의 산골에서 자란 이문옥씨가 어떤 자세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지는 다음 일화에서 읽을 수 있다. 행정주사보로서 총무처 근무 5년여가 됐을 무렵인 69년2월에 고향 나주에서 국회의원 재선거가 실시됐다. 소송에 의해 당선무효가 됐기 때문에 선거를 다시 실시했는데, 출마자는 공화당 이호범 후보와 신민당 정명섭 후보 둘뿐이어서 여야가 치열하게 대결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선거기간중 하루는 총무과장실에서 자기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과장실로 갔더니 응접의자에는 웬 건장한 남자 두 사람이 과장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가 과장에게 왜 찾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그중 한 남자가 그에게 대뜸 명령조로 “고향에 가서 집안 어른들과 고향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나 하고 돌아오시오”하는 것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그들의 무례한 행위에 불쾌해하면서 완곡하게 “하고 있는 일 때문에 갈 수 없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갔다 오시지”했고, 그는 갈 수 없다고 버티다가 과장실에서 나와버렸다.

 
그 남자들은 김형욱이 이끄는 중앙정보부 요원들로서 공무원들의 선거운동을 강요하려 온 것이었다. 위세당당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돌아온 뒤 그는 께름칙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자기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 또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어떤 불리한 일을 당할지 걱정이었으나 다행스럽게 아무일도 없었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됐기 때문이었는지 그 ‘거절’에 대한 보복은 없었다. 오히려 72년에 그는 자원했던 감사원으로 전보됐다.

자신의 과거지사에 대해 얘기할 때 그는 몹시 수줍어하며 질문에 대한 답을 매우 짧게 했다. 언뜻 듣기에는 표현력이 부족한것 같았으나 화제가 공무원의 신분과 감사원의 위상문제 이르자 그는 적절한 예를 들면서 명쾌하게 얘기했다.

“80년 공무원 해직 때 감사원에도 일부 명단과 함께 몇명 자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방법이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55세 이상되는 직원들을 해직시켰어요. 나이가 같은 사람들이 나오니까 생년월일 순으로 잘랐는데 이때 커트라인에 걸려 해직된 어떤 사람은 2년 후에 사망했어요. 이 해직은 말도 안되는 탈법이었지요. 그런데 이 해직을 주도했던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장이 그 뒤 바로 감사원 사무총장으로 왔습니다. 이런 구조 가지고 감사원이 독립성을 확보할 수는 없지요.”

 
 
열차에서 내려 고향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는 감사원의 독립성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중진국 이상의 어느 나라에도 감사원은 대통령 직속이 아니라 독립되어 있다는 것, 감사원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성역’은 갈수록 커질 것이라는 것, 직업공무원제가 확립되어야 공무원들이 정년까지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그는 감사원 교육담당관실에서 강의를 맡았을 때 강의시간이면 언제나 “여러분은 직업공무원이며 직업공무원은 부정한 지시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감사자료’가 보도되기 전날인 지난 5월10일의 마지막 강의에서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외출중이었다. 다음날부터는 휴가였고 그가 제보한 감사자료가 보도될 예정이었다. 그는 시험중인 고2 딸애에게는 아무 말 안하고 중2 아들에게만 대충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잠시 시골에 다녀오겠다는 메모를 남긴 뒤 집을 나와 강릉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5월15일 그는 감사원에 출근하여 제보자는 자신임을 스스로 밝혔다. 곧이어 감찰담당관에게 불려갔고, 오후에는 사무차장을 만나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이날 밤 그는 조사받던 감찰담당관실에서 검찰로 연행되었고, 다음날 구속됐다.

 고향에 도착해 성묘가 끝난 뒤 기자는 성주 이씨인 그의 조상들이 나주 산골에서 살게 된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는 또 수줍은 듯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李稷의 17대손이라는데…뭐 그런 것까지…”하고 말문을 닫았다. 그러나 재차 물었더니 그는 단종이 폐위된 뒤 이직의 증손자가 아버지를 모시고 나주에 숨어 살게 된 것이 그의 조상들이 나주에서 살게 된 유래라고 했다.

 문헌을 보면 성주 이씨 상당수가 세조 때 벼슬을 버리고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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