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올해의 표상' 남산
  • 許匡畯 기자 ()
  • 승인 1994.12.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난의 山에 부활의 별곡

<시사저널>은 올해의 표상으로 서울 남산을 선정하였다. 남산은 도시화와 개발에 의해 침식된 이 나라 자연의 상징이며 현장이다. 그리고 이제 개발 열풍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려 하는 인간의 꿈이기도 하다.

도시에 포위된 이 작은 산은 지금 절명의 위기 속에서, 개발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역사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남산에는 이제 개구리도 땅강아지도 살지 않는다. 남산의 상징이던 늘푸른 소나무도 그 빛을 잃었다. 산으로서의 형식은 갖추었으되 산이 가져야 할 내용은 오로지 인간에게 빼앗겨온 수난의 남산.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훼손의 외길로 줄달음쳐온 백년 역사를 마감하고 서울을 감싸는 안산(案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서울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남산 제 모습 가꾸기 계획’은 이 메마르고 황폐한 산을 도시의 찌든 형해로부터 건져낼 수 있을까. ‘올해의 표상’ 남산의 깊은 병과 그 치유책을 살펴본다.

 
유럽의 근대는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바스티유 감옥의 문이 깨지면서 열렸다. 파리 시민들은 전제 정치의 상징인 이 철옹성을 열어젖히며 왕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달 서울 남산 중턱에서 무너져내린 외인아파트는,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망가져 오기만 한 남산의 한 세기 수난사를 마무리하는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20여년 동안 완강하게 버티고 서서 남산의 풍모를 가렸던 이 건물을 폭파 해체한 것은 남산이 ‘혁명적 변화’의 새 시대로 접어듦을 알리는 표석이 되었다. 변화의 형식은 파괴였으나 그 내용은 보호이다.

 6백년 전 서울이 한반도의 도읍으로 정해지면서부터 남산은 서울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해 왔다. 서울을 감싸고 있는 다른 봉우리들과 달리 남산은 산꼭대기에 바위가 거의 없고 부드러운 능선으로 되어 있다. 보기에 장쾌한 눈맛은 없지만 그만큼 친근하고 다정다감한 존재였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남산은 여기저기 좀먹히고 깎이고 파헤쳐져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서울을 지배하는 권력들이 명멸할 때마다 조금씩 제 모습을 잃어갔다. 일제 침략기에는 한민족의 정기를 억누르는 식민지 경영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권력의 편의에 따라 산자락 곳곳에 시설물이 들어서고 권세가 등등한 기관들의 집결지가 되었다(위 그림 참조).

 한반도의 중심인 서울, 그 중에서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남산. 북위 37°32′07″~33′21″, 동경 126°58′53″~127°00′21″좌표 안에 위치하며, 높이 2백62m, 넓이(남산공원)는 약 3백㏊이다. 자연지리적인 남산의 위치는 변함이 없지만 인문지리적 남산은 움직이고 있다. 서울이 남쪽으로 넓어짐에 따라 남산은 더 이상 남쪽의 산이 아니라 ‘중산(中山)’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남산은 서울의 딱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을 흐르는 산세는 철령에서 태백산맥과 갈라져 광주산맥을 타고 서남쪽으로 향한다. 높고 낮은 봉우리를 거느리며 뻗던 광주산맥은 서울 북쪽에 이르러 다시 도봉산과 북한산을 일으켜 세운다. 북악산이 그 앞에 놓이고, 건너편에는 남산이 솟는다.

 남산의 산세는 한강을 건너 관악산으로 이어진다. 풍수지리적으로 남산은 북악산·인왕산·낙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네 산, 즉 내사산(內四山)에 해당한다. 서울은 이 내사산과 바깥쪽의 외사산(外四山):북한산·용마봉·관악산·덕양산) 능선이 이루는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조경기술사인 서원우씨(농학박사)는 서울의 적절한 규모는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분지의 도심은 작게는 내사산 안, 크더라도 외사산 안에 담겨 있어야 안정되고 펑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63년 경기도 양주·광주·김포·시흥군 12개 면이 서울로 편입되면서 자연지리적 균형은 깨져버렸다.

 
빌딩 속에 고립된 ‘외로운 섬’

 남산의 형국은 누에를 닮았다. 동봉과 서봉 엇비슷한 봉우리 두개로 이루어진 남산의 옆모습은 영락없이 누에의 모양이다. 누에의 머리에 해당하는 서북쪽 바위에는 지금도 ‘잠두암’(누에머리바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남산을 위에서 보면 산세가 거북을 닮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북쪽으로 필동과 장충동 방향, 남쪽으로 용산과 한남동 방향으로 퍼지는 산자락이 거북의 네 다리가 되고, 남대문 방향으로 삐죽 튀어나온 부분은 거북 머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원래 남산의 산자락은 낙산이나 인왕산 같은 주변의 산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서울 도심 구릉지를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도 이 산세의 흐름을 좇아 성벽을 쌓았다. 동대문에서 장충동 쪽을 지나 남산으로, 다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방어에 유리하도록 전개된 지형 위에 인위적 구조물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산은 완전히 고립된 산이다. 주변 빌딩에 포위된 남산은 산아라기보다는 섬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경재 교수(서울시립대·조경학과)는 “남산은 바깥 세계와 생태적·지리적 연결이 모두 차단된 섬이 된 지 오래다”라고 말한다.

 남산은 공해와 살림살이에 찌든 서울 시민의 모습처럼 피폐하고 곤궁하다. 남산 주변으로 나있는 순환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한 해 25만대나 된다. 도심에서 한남동이나 용산 쪽으로 빠지는 주요 통로인 남산의 1~3호 터널은 수시로 정체되어 자동차들로 가득찬다. 도시 한가운데서 집중적으로 뿜어내는 매연은 그대로 남산을 향해 쏟아진다. 올해 10월에는 평균 산성도 5.8pH의 산성비가 남산 주변에 내렸다.

어떤 날의 산성도는 4.4pH까지 악화하기도 했다. 산성비를 뒤집어쓰는 남산의 토양도 급격히 산성화하고 있다. 현재 남산 토양의 산성도는 지역에 따라 4.0~4.3pH에 이른다. 환경학자들은 땅의 신성도가 이 정도라면 극히 강한 산성으로, 이런 곳에서 자랄 수 있는 나무 종류는 아주 제한되는 것으로 평가한다. 서울을 짓누르고 있는 ‘열섬 현상’은 남산을 정점으로 하고 있다. 남산은 지리적으로 서울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공해 피해 측면에서도 어쩔 수 없이 대도시 서울의 중심이다.

공해에 찌들어 소나무 못 자라

 이같은 고립과 오염으로 남산의 생태계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다. 현재 남산에 사는 포유류는 두세 종밖에 없다. 산에 깃들여 삶직한 것은 다람쥐뿐이다. 다른 두 종이란 쥐와 야생화한 고양이이다. 야생 조류도 점차 종류와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다. 땅이 산성화해 이제는 땅강아지나 지렁이조차 희귀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남산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소나무는 일부러 가져다 심어야 할 상황이 됐다. 서울시는 ‘남산 제 모습 가꾸기’ 사업을 본격 추진한 91년부터 해마다 소나무를 옮겨다 심고 있다. 작년에는 2천3백57그루를, 올해에는 약 2천5백그루를 새로 남산에 이식했다.

 漢陽圖·漢城全圖·城市全圖 등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고지도에는 남산이 짙은 색으로 나타나있다. 남산의 본디 이름인 목멱산(木覓山)·목밀산(木密山)은 나무가 울창하다는 뜻이다. 당시 울창한 송림을 지키고 무속이 번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정은 남산을 특별 지역으로 지정해 출입과 벌목을 금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도에도 남산 봉우리를 중심으로 남대문 쪽에서부터 금우(禁右) 금중(禁中) 금좌(禁左) 금전(禁前)이라고 표시돼 있다.

 송림이 집중적으로 망가진 일제시대 이후 남산은 제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 남산 식물 세계의 주인은 소나무에서 아카시나무로 바뀌었다. 전체 면적 중 아카시나무가 우세한 지역은 37.6%이며, 소나무는 20% 남짓하다. 활엽수가 뒤섞인 수풀이 19.2%, 신갈나무숲이 15.2%로 그 뒤를 잇고 있다. 햇볕이 잘 드는 남쪽 비탈에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신갈나무는 북쪽의 우점종이다. 아카시나무는 산록 여기저기에 번성하고 있는데, 특히 도로 주변에 밀식해 있다.

터널 3개가 수맥 끊어 물도 부족

 서울시가 남산의 제 모습을 찾으려고 소나무를 심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먼저 생태계를 면밀하게 조사한 후 신중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경재 교수는 남산 식물계를 아카시나무가 지배하게 된 것은 아카시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잘 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주변 환경은 그대로 둔 채 생태적으로 맞지 않는 다른 지역 소나무를 옮겨심기만 한다고 해서 생태계가 복원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은식 교수(국민대·산림자원학과)는 “소나무 숲이 망가지는 것은 공해 탓보다 소나무가 다른 나무에 비해 경재력이 약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소나무를 일부러 갖다 심으면 남산의 숲이 자연성이 매우 낮은 숲이 되어버리고, 이에 따라 원래의 자연 경관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남산 기슭 여기저기를 좀먹고 있는 여러 가지 시설물도 경관과 생태계를 해치는 남산의 적이다. 외인아파트는 시원하게 무너졌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시설물은 많다. 많은 사람이 남산타워(서울타워)를 골치덩어리로 꼽는다. 한 원로 조경학자는 세계 어디에도 도시의 지배 경관인 산악 정수리에 탑을 박은 사례는 없다고 지적한다. 남산타워는 자체 높이가 2백36.7m로, 남산보다 높다.

 
남산 밑으로 뚫려 있는 터널 3개는, 교통 소통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남산의 수맥을 끊어 물이 풍부했던 남산을 건조하게 말려버린 데 일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타워 주변에 있는 방송 송신탑도 경관을 해치는 대표적 시설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동봉에 있는 미군 통신대 시설물은 한남동 쪽의 미군 종교 휴양소와 함께,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 여부와 운명을 함께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쪽 필동 수방사 자리 6만2천6백여㎡는 군부대가 91년 5월에 떠났고, 그 옆 안기부 자리 7만7천2백㎡는 현재 이전을 전제로 서울시와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그밖에 장충동 쪽의 국악고, 종교 휴양소 부근 남산맨션아파트 1백27세대와 외인 주택 등이 이미 떠났거나 이전 계획에 포함돼 있다. 서울시는 남산을 되살리는 사업의 상징으로 외인아파트를 폭파 철거한 후, 또 다른 해체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불법 건축물로 밝혀진 남산맨션아파트는 철거를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남산타워나 주변 호텔, 케이블카 같은 시설물은 앞으로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대로 쓰도록 하고, 수명이 다하면 무너뜨리기로 방침을 세워두었다. 물론 그동안에 시설물의 증·개축은 엄격히 제한된다.

 92년에 서울시가 ‘남산 제 모습 가꾸기 기본계획’을 확정한 후 남산은 오염과 훼손과 역사 백년 만에 처음으로 보살핌을 받고 있다. 서울시는 우선 2000년까지 제1단계 사업으로 순환도로 위쪽 공원 지역을 새로 정비해 파괴되어온 남산의 옛 모습을 복원하기로 했다.

“보여주기 위한 행정은 곤란

 제 모습 가꾸기 계획의 골자는 남산의 자연 환경을 보존하는 것과 시민 공원으로서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남산을 높이에 따라 셋으로 나누어, 산꼭대기 부분은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으로 활용하고, 산중턱은 자연 생태를 적극 보호하는 공간으로 남겨두며, 시가지와 산이 만나는 산자락은 공원으로 조성해 역사와 문화의 학습터로 가꾸어나가기로 했다.

 남산을 되살리는 작업의 출발은 순조로운 것처럼 보인다. 남산을 남북 양쪽에서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외인아파트와 안기부·수방사 터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수방사터는 도시구획상 공원 지역은 아니지만, 워낙 터가 넓고 시민들이 남산으로 접근하는 길목이어서 계획 대상에 포함되었다.

 서울시측이 남산 종합 계획을 세우면서 고민했던 것은 무엇이 남산의 ‘제 모습’인가 하는 점이었다. 전문가 중심으로 조직된 세 분과위원회(자연보전·역사문화·경관관리)도 남산을 되살렸을 때의 모습을 각기 다르게 그리고 있었다. 남산 제 모습 가꾸기 계획을 입안해 추진한 강홍빈 서울시 정책기획관은 “남산이라는 존재는 도시 속에서 살아 숨쉬며 변화하는 존재이므로 ‘어느 시점의 남산’이란 개념은 무의미하다. 결국 남산의 제 모습이란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역사 문화적으로 주체적인 시민의 공간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정의했다.

 서울시가 구상하는 대로 남산의 녹지 공간이 회복되면 남산은 북한산-북악산-종묘-남산-용산공원(예정)-국립묘지-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종육경축(縱陸境軸)과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횡수경축(橫水境軸)의 중심이 된다.

 그동안 남산 주변에서 벌어져 온 개발과 보호의 충돌은 제 모습 가꾸기 계획이 입안되는 과정에서도 계속됐다. 장충동 쪽에 자리잡은 동국대학교가 고층 건물을 새로 지으려 했으나, 이 계획의 자문을 맡고 있는 ‘100인 시민위원회’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기도 했다. 또 이태원 쪽에 군인아파트가 재개발되어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게 되자 서울시는 여론을 배경으로 해당 주택조합과 싸우다시피 하여 아파트 층수를 제한하고 녹지 공간을 따내기도 했다.

 남산 제 모습 가꾸기 계획으로 그동안 멀어지기만 했던 남산이 시민 생활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지 기대가 높아지고 있으나, 새로운 계획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환경 전문가들은 이 계획이 남산 개발의 새로운 간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김은식 교수는 “정부 예산은 흔히 밖으로 드러나는 쪽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남산 계획이 절대 ‘보여주기 계획’이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남산에게 제 모습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공원 같은 주변 시설을 새로 짓기보다 생태계를 되살리는 데 가장 주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남산 보호는 생태계 살리기부터

 다른 한 교수는 남산을 괴롭히는 병부터 먼저 진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태 상황에 대해 정확히 진단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손대다가는 병도 모르고 통증만 가라앉히는 대증요법에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남산의 생태계가 정밀하게 조사된 것은 없다. 남산에 어떤 곤충들이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남산공원관리사무소뿐만 아니라 남산생태계관리소를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시인 鄭以吾는 남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은 〈南山八詠〉을 지었다. △구름이 북쪽 궁궐을 가로지르는 경치 △물이 넘치는 한강을 바라보는 경치 △바위 밑에 그득한 꽃 △고개 마루의 높은 소나무 △봄의 답청 놀이 △중양절의 등산 놀이 △초파일날 관등 야경 △시냇물에 갓끈을 빠는 피서 등이 그것이다.

 지금 되살릴 남산의 모습이 조선 중기의 이같은 모습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많은 건물을 지으려는 공간에서 오히려 있던 건물을 허무는 공간으로 바꿈한 의미는 크다. 이제 비로소 남산은 개발할 대상에서 보호할 대상으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시민들은 외인아파트 폭파의 고고성이 남산 골골에 메아리친 94년이 남산 보호 정책의 원년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