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올해의 인물' [문화] 강제규 감독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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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파이’ 키운 뚝시의 흥행사

전국 관객 5백79만 명(영화사 통계). 서울 극장 관객 35만 명. 더 실감 나는 통계가 있다. 서울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인구(15세 이상) 가운데 30%가<쉬리>를 보았다. 대붕 문화 영역에서 올해의 인물로 강제규 감독을 꼽는 데 이견이 없었다. 지난날 <서편제>가 그랬듯이 <쉬리>는 그저 영화 한편에 그치지 않는다.

 
<쉬리>는 파이의 크기를 키움으로써 한국 영화에 새 바람을 불렀다. 멜로나 코미디에만 몰두해온 관성에서 벗어나 새 분야에 도전했다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대기업이 철수한 뒤 위축되었던 영화계가 <수리>가 성공함으로써 투자자의 관심을 모은 것도 사실이다.

<쉬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 영화도 제값 받고 팔려야 한다’는 강감독의 지론에 따르면, 해외 판매 실적도 그의 성과를 논할 때 포함해야 한다. 간판을 내린 후에도 <수리> 증후군은 오래 지속되었다. 일본에 1백50만 달러를 받고 판매한 것을 비롯해 홍콩에서는 지난 11월 16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흥행 영화로 꼽히는 홍콩ㆍ할리우드 영화와 정면으로 맞붙어서 개봉 첫주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현재 유럽 배급사와 조건을 놓고 협의 중이다. 이만하면 ‘해외에서도 팔릴 물건을 만들겠다’는 강감독의 호언이 허장성세는 아니었던 셈이다.

역경에서 건져올린 ‘블록버스터’
<쉬리>는 우선 강감독 개인에게 의미가 각별하다. 데뷔작 <은행나무침대>로 힘겹게 쌓아올린 탑이, 직접 기획하고 돈까지 댄 <지상만가>가 망하는 바람에 와르르 무너졌다.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살던 집도 내주어야 했던 막다른 궁지에서 강감독은 오히려 당찬 승부수를 띄웠고, 배짱에 걸맞는 보답이 주어졌다.

처음부터 장밋빛은 아니었다. 믿었던 아내마저 시큰둥했던 시나리오, 그는 소신을 버리지 않고 정성껏 내용을 다듬었다. 게다가 투자자는 ‘내용은 좋다’면서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끝없는 설득.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드는 일인지 몰랐다”라고 그는 회고한다.

하지만 이미 <쉬리>는 개인적인 성공담 차원을 넘어섰다. 외화와 한국 영화를 통틀어 ‘흥행 1위’라는 영예를 차지한 것말고도 ‘문화산업’이라는, 말 많고 탈 많은 개념을 논의하는 데도 시사점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이고 언론이고 할 것 엇이 관객 백만 명을 가뿐히 넘어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열광할 때, 한국 영화는 아무리 흥행작이라고 해봐야 30만~40만을 넘어서기 힘들었다. 그런데 <쉬리>는 개봉 초반에 이를 앞질렀다.

그래서 <쉬리>를 논할 때 꼭 따라붙은 용어가 ‘한국형 블록버스터’다. 정부가 ‘<쥐라기 공원>이 현대 자동차 백만대와 맞먹는 부가 가치를 창출한다’며 영상산업 진흥의 깃발을 내건 지는 오래되었지만, 사실 <쉬리>이전만 해도 영화로 돈을 버는 것은 먼 나라 얘기였다 <수리>는 이 지형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현재 <쉬리>의 투자 대비 수익률은 4배 정도. “수치보다 중요한 점은, 문화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라고 강감독은 말한다.

그는 오락 영화를 맛있는 음식에 비교하곤 한다. 음식을 먹을 때 이것저것 따지지 않듯이 관객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영화면 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개봉 초기 평단의 반응이 시큰둥했는데도 이에 개의치 않은 것은, 그에게는 관객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가장 큰 미덕은 한국영화의 파이를 키웠다는 점. 올해 상반기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이 20%대에서 40%대로 껑충 뛰어오를 수 있었던 것은 <쉬리>가 선도한 덕분이라는 데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그는 <은행나무 침대>의 속편인 <단적비연>(연출 박제현)을 제작한다. 내년 6월 말 개봉할 이 영화에는 최진실ㆍ설경구ㆍ김석훈ㆍ김윤진이 캐스팅되었는데, 또 한차례 바람몰이가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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