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의 땅에 ‘비둘기 날다’
  • 런던․韓准燁 통신원 ()
  • 승인 199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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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평화안’ 도출… ‘26년 유혈 폭력’ 종지부 가능성

 ‘메이저 총리가 북아일랜드에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킨다면 그것은 영국 정치사에 일대 기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기적이 실현될 조짐이 서서히 우리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2월22일 발표된 영국․아일랜드 정부간 북아일랜드 사태 해결을 위한 공동계획안, 즉 ‘미래를 위한 구상(Frameworks for the Future)’에 대한 <데일리 미러>의 논평이다. 영국의 2대 타블로이드 신문 가운데 하나로 친노동당 노선을 표방하면서 메이저 총리의 보수당 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해온 <데일리 미러>의 이례적인 찬사는, 영국인들이 북아일랜드 사태를 얼마만큼 부끄럽게 생각하며, 그 해결을 열망하는가를 보여준다. 야당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당수도 의회에서 메이저 총리의 노력에 초당적인 지지를 약속하는 연설을 했다. 주요 정책에 이처럼 여야가 조건을 달지 않고 의견을 같이한 것은 포클랜드 사태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메이저 총리와 존 브루턴 아일랜드 공화국 총리 분쟁 현장인 얼스터 지방(아일랜드의 옛 주명으로 현재의 북아일랜드)의 주도 벨파스트 시에서 공동발표 형식으로 공개한 26쪽짜리 ‘미래를 위한 구상’은, 신․구 교도로 갈린 북아일랜드의 두 적대 세력, 즉 연방주의자들과 통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앞으로의 협상에서 상대측에 양보해야 하고 또 반대 급부로 요구할 수 있는 여러 사항을 담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가 길고도 어려운 협상과 진통 끝에 출산한 이 기본구상은, 사태 해결을 위한 주요 사항은 현지의 여러 정치단체와 주민들이 합의하는 ‘독립 자결’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같은 대원칙 아래 기본구상은 다음과 같은 주요 제안을 담고 있다.

 △비례대표제로 선출한 주민 대표 90명이 단원제 의회를 구성하며, 이 기구는 왕실․외교․국방 업무를 제외하고 교육․보건 업무 등에 제한된 입법권을 갖는다. △새로 구성된 북아일랜드 의회와 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 의회가 각각 선출한 대표로 구성하는 공동기구가 양측의 공동 이해 관심사를 논의한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헌법을 개정하여 북아일랜드 지방에 대한 헌법상 영토 주권을 포기한다. △영국법을 개정해 앞으로 북아일랜드 주민들이 투표에 의해 자기들의 정치적 운명과 미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이 기본구상은 연방주의와 민족주의 양대 세력의 요구 사항을 같은 비중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방주의자들과 대부분의 영국 언론은, 이 제안이 남․북 아일랜드의 기존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다져 나감으로써 북아일랜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친민족주의자들의 견해를 기본 축으로 삼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양측 정부는 이 기본구상안이 현지의 분쟁 당사자는 물론 아일랜드 섬 전체 주민에 의해서 더욱 광범위하게 고려되기를 촉구한다’는 구절 때문이다. 이같은 제안 문구에 대한 연방주의자들의 강력한 비난과 반발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교도로서 영국의 일부로 계속 남기를 원하는 연방주의 세력들은 ‘아일랜드 섬 전체 주민’이라는 문구가 바로 영국이 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에 북아일랜드를 팔아 넘기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북 양측이 관여하는 공동기구 설치 제안 역시 연방주의 세력들의 분노를 사는 부분이다.

연방주의 세력 반발이 해결 과제

 연방주의 세력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영국 정부가 시간이 흐를수록 북아일랜드 사태에서 공정한 입장을 취한다는 명분 아래 발을 빼려 하고 있으며, 결국 북아일랜드를 영국 영토로부터 분리해 남쪽에 합병시키는 일까지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에서다. 따라서 연방주의 세력 가운데 강경파인 민주연방당(DUP)의 이안 페이슬리 대표는 이번 기본구상을 ‘연방주의 세력을 향한 선전포고’라고 비난했다. 온건파인 얼스터연방당의 켄 매긴스 의원 역시 이번 제안은 통일 아일랜드 공화국 수립을 위해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공화국이 합작한 비열한 청사진으로 몰아붙였다. 이같은 비난과 우려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메이저 영국 총리와 존 브루턴 아일랜드 총리는 ‘평화안’이 최종 청사진은 아니라고 말했다.

 메이저 총리의 보수당 내각은 연방주의자들이 현재는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앞으로의 상황 변화에 대한 신교도들의 두려움을 의식한 나머지 기본구상안에 반대하지만, 결국 실질적인 대화를 위한 협상 테이블에서 머리를 맞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기본구상안 발표에 맞춰 연방주의자들의 양대 정당인 민주연방당과 얼스터연방당이 북아일랜드의 미래를 위한 별도 안을 내놓은 것은, 앞으로 있을 협상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반영하여 관철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것이다.

 아일랜드공화군측이 예상한 것과 달리 연방주의자들은 휴전 6개월 동안 테러 중지 약속을 지켜 종래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털어내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연방주의자들이 군사단체를 부추겨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유혈 시위를 할 경우 주민들의 지지를 상실하는 것은 물론 본토와 국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휴전 선언 발효 이전에 이같은 기본구상이 발표됐다면 연방주의자들의 군사 조직인 왕당파 준군사 행동대들은 가톨릭계 주민들과 아일랜드공화군측에 보복 테러를 가했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연방주의자 정치단체나 신교도 주민단체 내의 대다수 하부 구성원들은 지난 26년 동안 끊임없이 폭력 테러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폭력 배척 분위기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 이제 분쟁 해결은 폭력이 아니라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론이 신교도와 구교도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북아일랜드공화국의 휴전 선언 이후 지난 6개월 동안 얼스터 지방에서는 관광산업이 활기를 띠고 외국 자본의 유치 증가 등 경기 회복 조짐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경제계는 양측 정치 지도자들에게 피를 부르는 투쟁보다는 북아일랜드 주민에게 번영을 약속하는 경제를 우선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2월25일 영국 본토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메이저 총리가 주도해 탄생한 영․아일랜드간 기본구상안에 영국 국민의 92%가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북아일랜드 연방주의자들의 기본구상안에 대한 반발과 협상 불참 입장 표명에 대해서는 영국 국민의 65%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기적의 평화=메이저 총리 위기?

 메이저 총리의 북아일랜드 사태 해결 노력에 이처럼 영국 국민이 지지를 보내는데도 대부분의 언론과 정치 분석가들은 메이저 총리가 자칫 정치적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고 내다본다. 그것은 그동안 하원에서 집권 보수당에 동조․지지하는 입장을 보여온 북아일랜드 연방주의정당 소속 의원 12명이 기본구상안 발표에 대한 반발로 당분간 보수당 지지 노선을 철회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원에서 제1 야당인 노동당이 제3당인 자민당 및 군소 정당과 연합할 경우 야당보다 겨우 2석 많은 보수당은, 당내 유럽통합 반대파 의원들의 반발이 반란표로 이어진다면 내각 존립 자체까지 위협받게 된다. 그럼에도 메이저 총리는 영국 정치사에 기적으로 기록된 북아일랜드 사태 해결에 정치 생명을 걸고 있다.

 기본구상안 발표 이후 메이저 내각은 연방주의자들의 반발이 누그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와 동시에, 첫 평화 회담의 전체조건으로 아일랜드공화군의 정치회담 기구인 신페인당을 통해 아일랜드공화군측이 은닉한 무기를 모두 공개 반환하려고 촉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연방주의와 민족주의 두 적대 세력은 영국 정부를 겨냥해 말로만 공세를 퍼부으며 9월 이후 테러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

 양측의 자제로 휴전 선언 효력이 올 한 해 계속될 경우 당사자간 협상을 통해서 얼스터 지방은 북아일랜드 의회가 처음 구성되는 97년 이전까지는 평화를 정착시킬 확실한 토대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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