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은 파산 ‘통제구역’?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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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덕산그룹 사태에 ‘이중 해법’

정부는 덕산그룹 구제를 ‘거절’했다. 창업이 자유롭다면 경영을 잘못해서 망하는 것(퇴출) 역시 막지 않아야 한다는 시장 논리를 적용한 것이다. 정부는 덕산그룹을 위한 구제 금융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러나 정부는 ‘예금자 보호’라는 명분에 묶여 이 경제 논리를 완전하게 적용하지는 못했다. 덕산그룹이 호남 지역의 대표적 기업이라는 점에서 지역 경제에 미칠 혼란에 대해 배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계열사인 충북투자금융이 금융기관이라는 점에서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정부는 지역 경제에 미칠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속하게 지원책을 내놓고 2월 말에 광주․전남 지역 중소기업에 대해 6백억원의 자금을 지원했다. 3월 초에는 광주은행과 충북은행을 통해 6백억원, 충북 지역 중소기업 대상으로 지방 중소기업자금(절반은 한국은행이 댄다) 2백억원, 광주․전남․충북 지역의 투자금융․종합금융․상호신용금고에 대해 신용관리기금에서 2백억원을 긴급 수혈했다.

 재정경제원의 한 관계자는 덕산이 서울 지역 기업이었다면 이런 조처는 발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광주․전남과 충북 지역은 현 정부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바람을 타는 곳이다. 덕산 사태의 해결 방안이 정부가 아닌 고위 당정회의에서 나왔다는 것도 이같은 ‘정치성’을 엿보게 한다.

 이미 1차 부도를 낸 충북투자금융을 인가 취소(파산)하지 않고 구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두고두고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다. 3월2일 충북투금에 대해 업무 정지 명령을 내린 정부는 11일까지 정밀 실시한 후 구제 불능이라고 판단되면 파산 쪽으로도 결론을 낼 수 있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실사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살리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 있는 셈이다.

 충북투금은 16.8%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가 부도에 몰리는 외부적인 요인만으로도 휘청거렸다. 2월27일(32억원)과 28일(81억원) 이틀간 1백13억원의 예금 인출 요구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지급 불능 사태가 발생했다. 금융기관임에도 그 정도의 시재금이나 유동 자산이 없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각각 3천억원이 넘는 여․수신이 정상적인 과정에서 조달되고 대출된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시각도 있다.

 80년 청방의 전응규 회장 등 충북 지역 상공인들이 주축이 돼 자본금 20억원으로 출발한 충북투금은 이미 몇 차례 도산 위기를 맞았던 금융기관이다. 92년 4월 서울 리버사이드호텔 고의 부도 사건이 터졌을 당시에는 불법 대출해준 것이 알려져 예금 인출 사태가 빚어지자 신용관리기금으로부터 1백60억원을 긴급 수혈받기도 했다. 2월말 현재 자기자본이 1백91억원인 충북투금은 3년 연속 적자를 내고 있으며, 그 액수도 커지고 있다. 전국 15개 투자금융사 가운데 수신고면에서 14위이다.

한국 금융 어두운 현주소 드러내

 청방측은 경영이 계속 악화하자 지난해 12월 소유 지분(16.82%)을 덕산그룹에 팔았다. 덕산측이 제시한 가격은 1백90억원으로 당시 증권업계에서 보는 시세보다 3배 이상 높았다. 덕산이 이같이 웃돈을 주고 무리하게 충북투금을 사들인 것은 자금 조달에 유용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사금고화 기도는 실제 인수 당시 5백억원의 어음보증을 요구한 데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금융계에서는 덕산과 고려시멘트 부로 사태로 인한 피해 규모가 1조원에 달한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3월3일 현재 덕산그룹 12개 사는 8백2억원의 부도를 냈고, 고려시멘트 관련 3개사 부도 액수는 7백7억원이다. 이번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덕산에 3천8백39억원의 여신(대출 및 지급보증)이 물린 금융기관들이다. 이들은 피해자이면서도 그렇게 당당한 처지가 못된다. 개인이 5백만원을 빌리려고 해도 시시콜콜 따지는 금융기관들이 누가 보아도 위험 수준인 기업에 최근까지도 거액을 대출해 주었기 때문이다. 대출 심사 기능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금융계 관계자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 것은 ‘서석동(광주) 할머니’의 후광이다. 박상섭․성현 형제의 모친인 정애리시씨를 지칭하는 것이다.

 덕산그룹은 90년 초까지 시멘트 생산으로 잘 나가던 회사였지만 90년 들어 지난해까지 계속된 확장으로 파국을 맞았다. 덕산그룹의 한 관계자는 “심하게 말해 자고 나면 계열사가 하나 늘었다. 엄청난 확장에 막연히 뭔가 믿을 데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라며, 그룹의 자금줄이 꼬이기 시작한 직접적 원인은 부실덩어리인 무등건설 인수였다고 말했다. 무등건설 어음을 막기 위해 단기 악성 자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덕산그룹의 행로는, 살릴 기업과 청산할 기업을 가려낼 채권단 손에 달려 있다. 법정관리 신청을 낸 고려시멘트는 법원이 판단할 것이다.

 덕산 사태는 한국 금융의 어두운 현주소를 드러냈다. 금융기관에는 대출 심사 기능이 없다시피 하며 당국은 감독을 소홀히 했다. 그리고 아무리 부실해도 금융기관은 안전하다.

 덕산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식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국 중앙은행의 결정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영국 베어링그룹에 비하면 충북투금은 비교할 수도 없는 초경량급 금융기관이다. 영국은 베어링그룹의 파산을 방치했고 한국은 충북투금을 살리려고 애쓰고 있다. 이같은 대응은 극히 한국적인 수준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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