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보루, 이들이 지킨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12.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실 밝혀낸 ‘개미 연구원’들의 정직한 반란

 
그곳은 본래 구인 구직을 위한 게시판이었다. ‘황우석 파동’의 와중에 일반에게도 친숙한 이름으로 떠오른 브릭(포항공대 생물학정보센터:bric.postech.ac.kr). 언론 보도를 접하고 그곳을 처음 찾은 일반인 중에는 문제의 황우석 논쟁이 벌어지는 곳을 찾지 못해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논쟁이 펼쳐진 곳은 브릭에서도 극히 주변부에 위치한 ‘소리마당’ 게시판이었기 때문이다(브릭의 주 메뉴는 ‘생물동향’ ‘실험정보’ 등 생물학 관련 최신 정보가 담긴 게시판들이다).

하루아침에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됐다고는 하지만, 황우석 파동이 터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브릭 ‘소리마당’ 게시판은 생명과학 분야 전공자들의 남루한 정보 장터에 불과했다. 석·박사 과정 연구원들이 주로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이곳에서 이들은 어떤 연구실의 환경이 좋은지 최신 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자신들의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

“ㄱ대 실험실은 분위기가 어떤가요?” “국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게 나을까요, 유학을 가는 게 나을까요?”처럼 자문을 하거나 “교수님, 삥땅치지 마세요” “우리 괴수(지도교수)는요”라고 푸념을 늘어놓는 식이었다. 

이곳이 북적댄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근무 환경이 열악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년이 멀다 하고 연구실을 옮겨다녀야 하는 석·박사가 수두룩한 현실에서 이곳 게시판은 이들 일용직·계약직 고급 두뇌의 인력 시장 구실을 해 왔다. 국내에 입성할 기회를 노리는 외국 유학생 또한 이곳을 즐겨 드나들었다. 

자신을 ‘브릭 마니아’라 소개하는 김 아무개씨(33)는 소리마당이 생긴 2003년 7월부터 이곳을 드나들며 적지 않은 위안을 얻었다고 말했다. ‘피해야 할 실험실/교수 블랙리스트’ 따위 정보를 얻는 것도 짭짤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며 ‘아,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진한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브릭·과기인연합·디시 과갤 ‘합동 작전’

이들이 황교수 파동을 겪으며 일순간에 ‘폭발’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을 일차적으로 분노하게 한 것은 ‘과학자 황우석의 전혀 과학자답지 않은 처신’(오오리군)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곳에는 배신감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박사 과정 연구자 박 아무개씨(31)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거의 ‘몰빵’하다시피 황교수에게 지원을 몰아주는 동안 우리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다. 어쨌거나 황교수라도 잘되면 생명과학 전체 파이가 커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논문 조작 의혹이 하나씩 불거지면서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나’ 화가 치밀었다. 고작 이 따위 허접한 걸 내놓는 데 그 막대한 돈을 퍼부었단 말인가!”

그러나 분노한다고 냉정함까지 잃지는 않는 것이 이들 젊은 과학자들의 미덕이었다. ‘anonymous’라는 회원이 ‘The show must go on’이라는 제목으로 황교수 논문에 사진이 중복 게재됐다는 의혹을 처음 제기한 12월5일부터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이 “줄기 세포는 없다”고 폭탄 선언을 한 12월15일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진실 찾기를 위한 10박11일의 대장정을 벌였다(상자기사 참조).

브릭뿐만이 아니었다. 이공계 연구자 1만7천여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한국과학기술인연합(www.scieng.net), 평소 애호가들이 과학적 유희를 즐기는 디시인사이드 과학갤러리(일명 ‘디시 과갤’:dcinside.com) 또한 이 기간 초유의 과학자 대동맹을 맺고 진실 탐구에 나섰다.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역할 분담은 환상적이었다. 이를테면 브릭에서 ‘anonymous’가 사진 중복 의혹을 처음 제기했을 때만 해도 주변에서는 잠시 관망하는 분위기였다. “논문 부록 중 똑같은 조각 그림들이 있으니 알아서 찾아보시라”는 식으로 문제 제기가 암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인연합의 또 다른 회원(‘지나가다가’)이 ‘anonymous’가 언급한 논문 부록을 일일이 뒤져 이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한 이후 충격은 일파만파로 확산돼 갔다. 

비주얼의 측면에서는 ‘디시 과갤’이 단연 앞서 나갔다. 디카 문화를 기반으로 탄생한 디시인사이드 회원들답게 논문 조작 의혹이 새로 불거질 때마다 이를 이미지로 표현하는 등 ‘과갤 햏자’들은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브릭 게시판은 사진을 올릴 수가 없게 돼 있기 때문에, 브릭 회원들은 디시 과갤의 이미지를 즐겨 링크시켜 놓곤 했다. 

비주얼이 디시 과갤의 몫이라면 전문적인 검증은 단연 브릭의 몫이었다. 이를테면 황교수의 2004년 논문과 미즈메디병원의 다른 논문 사이에 일치하는 사진이 있다는 의혹을 처음 제기한 것은 디시 과갤이었다. 이 의혹이 제기되자마자 디시 과갤은 “얼른 브릭 횽(‘형’과 유사한 어감을 갖는 은어)들한테 들고 가 검증받자”는 게시 글로 도배됐다. 이에 대해 브릭 회원들이 “문제가 있다”는 소견을 내놓자 디시 과갤 회원들은 그제서야 각종 포털과 언론 사이트에 이를 퍼뜨렸다.  

열악한 처우, 자부심으로 버텨내지만…

이 과정에서 브릭은 과학적 논증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은 이곳에서 자연 도태됐다. 예를 들어 줄기세포가 곰팡이에 오염됐다는 황교수의 발언이 문제가 됐을 때 “동물세포를 키우는 배양액 대부분에는 페니실린 등이 함유돼 있는데 어떻게 곰팡이가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했던 회원은 “페니실린 등은 곰팡이균이 아닌 박테리아를 제거하는 데 쓰이는 항생제”라는 다른 이들의 반박에 곧 꼬리를 내려야 했다.

그러나 의혹에 믿을 만한 근거가 있을 때면 이들은 놀라운 기동력을 보여주었다. 브릭 회원들의 제보를 토대로 황교수 논문의 사진 중복 및 DNA 핑거프린팅 조작 의혹을 최초 보도한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는 “어떤 날은 새벽에 메일을 열면 20통이 넘는 제보가 쏟아져 들어와 있었다”라고 말했다. DNA 관련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아릉’ 같은 이는 언론에 직접 자기가 발견한 사실을 제보하기도 했다. <사이언스>, 뉴욕 타임스 등에 관련 사실을 번역해 적극 알린 것도 이들 젊은 과학자 집단이었다.

외국 유학 중인 석·박사도 이를 거들었다. 세계적인 스캔들답게 이번 황우석 논쟁의 와중에는 이들 또한 실시간으로 개입했다. 디시 과갤의 한 이용자(‘김궁금’)는 “새벽 6시에 웬 접속자가 이리 많으냐”고 의아해 했다가 “상상력이 없다”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여기는 독일. 현재 밤 10시.” “여기는 캐나다. 오후 4시” 등 7개 나라별로 댓글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윗사람 눈치를 보느라 실명으로 나서기 쉽지 않은 국내 연구자들을 대신해 서명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UCLA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김윤철·전태준·박의선 씨는 지난 12월20일 ‘황우석 교수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고 황교수에 대한 징계 및 황교수 팀에 집행된 모든 연구비에 대한 회계감사를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유학생들끼리 황교수 사태를 지켜보던 중 이대로 가면 이번 사태의 핵심인 논문 조작 건이 가려질 수 있다고 판단해 서명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는 이들은 황교수를 ‘정치 생물학(political bi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연 기회주의적 수의사’로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들은 또 “이 과학자 아닌 과학자의 거짓말과 임기응변에 더 이상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보인다면 한국 과학은 전 세계로부터 외면을 당할 것이다”라며 고국에 경고장을 던지기도 했다.

지난 한 달 간 황교수라는 성역에 대항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이들은, 최근 들어 황교수에 대한 논의의 초점이 자꾸 흐려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지난 22일 ‘황우석 사태의 본질은 논문 조작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한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자 중 한 사람은  “황교수나 일부 언론이 논점을 자꾸 줄기세포 원천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로 몰아가는데 이는 본질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뉴욕 타임스가 “한국 과학계의 자정 능력을 보여주었다(12월16일자)”라며 이들 젊은 과학자를 추어올려도, 사실 이들의 비루한 일상이 바뀔 일은 거의 없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악화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차병원 줄기세포연구실 박규형씨(박사 과정)는 “석사 과정 이하 후배 대부분이 동요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황교수 파동으로 생명과학 분야가 직격탄을 맞으면서 이들의 앞날도 크게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황교수 파동 이후 누군가가 유력 학술지에 논문을 제출했다가 7시간 만에 퇴짜를 맞았다는 둥 생명과학계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 역시 이들에게는 악몽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번 기회에 과학자로서의 자존심과 검증 실력을 확인한 데 대해 강한 자부심을 내보였다. 한 줄기세포 연구자(박사 과정)는 “적어도 (실험) 현장에서는 우리가 웬만한 교수보다 실력이 낫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세포를 증식·배양하고 분화시키는 전 과정이 이들의 ‘손’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박사 과정 연구원이 DNA 핑거프린팅 조작 의혹을 ‘귀신같이’ 잡아낼 수 있었던 것도 현장에서 늘 데이터를 접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비참한 환경에 화가 나면서도 이들이 과학계를 떠나지 못하는 것 또한 이같은 자부심 때문이다. ‘월화수목금금금’ 연구팀을 가동시킨다는 황교수의 자랑에 ‘악덕 기업주’를 보는 것 같다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이들은 정작 휴일 근무를 자처한다. “연구자들의 스케줄은 가족이나 연인이 아닌 세포에 맞춰져 있다”라고 말하는 박규형씨는 ‘자식 같은 세포’를 돌보기 위해 일요일이건 크리스마스건 실험실을 드나들게 된다고 말했다.
  
앞서의 줄기세포 연구자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태를 ‘개미 연구원들의 반란’이라고 표현했다. 힘 없고 빽 없으되 과학에 대한 열정만은 충만한 개미 연구원들이 황우석으로 상징되는 거대 권력을 무너뜨린 이번 사건은 말 그대로 과학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쇼는 계속되어야만 한다(The show must go on)”라는 비아냥으로 시작된 이들의 반란은 바야흐로 결실을 맺는 중이다. 이들의 도전은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