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흥행 코드 아니다
  • 이형석 (<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05.12.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네마 키워드] 영화와 이데올로기:<청연> <태풍>

 
한국영화 최초의 미국 로케이션 항공 촬영과 3년 동안의 긴 제작 기간이 화제를 일으켰던 <청연>이 개봉된다. <청연>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민족주의적 시각을 최소화하거나 그것을 영화 바깥으로 밀어버리려는 구심력이 느껴져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일장기를 손에 들고 일본-조선-만주를 종단함으로써 대동아공영권의 상징적 제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조선 최초의 민간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사료에 허구적 상상력을 보태 멜로와 신파, 스펙터클과 휴먼드라마를 매끄럽게 엮어낸다. 실존 인물의 가상적 스토리인 멜로와 신파, 휴먼드라마에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역설적으로 일제시대라는 제한된 배경이 강요할 수 있는 민족주의적 시각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가능해진 듯 보인다.

비행의 꿈을 가졌던 한 소녀가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택시 운전을 하며 어렵게 비행학교에 다닌다. 영화 초반부는 택시 운전사와 손님으로 만난 박경원(장진영 분)과 친일 재벌의 아들이자 유학생인 한지혁(김주혁 분), 두 남녀의 연애담을 가볍게 다룬다. 이들은 일본 식민지시대에 일본에서 만나 연애하지만 흔하게 등장할 법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나 이로 인한 울분은 영화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한지혁이라는 인물도 다소 절망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이지만, 조국과 민족에 대한 부채감이나 죄책감이라기보다는 보통의 젊은이가 가진 회의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지혁의 귀국과 입대(일본군으로서)로 두 남녀는 헤어졌다가 몇 년 후 비행학교의 조종사와 기상장교로 다시 만난다.

박경원의 고민과 좌절은 하늘을 나는 꿈, 최고의 비행사가 되겠다는 야망에서 비롯된 것일 뿐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갈등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극의 중·후반부까지 박경원의 성공을 향한 의지와 두 남녀의 연애담이 줄기를 이룬다. 후반부에 와서야 일본 권력층에 의해 두 남녀의 운명과 사랑이 굴절되고 파멸되는 상황으로 극이 절정에 이르지만, 마지막 순간 박경원은 일장기를 들고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양이 되는 수모와 최고의 비행사가 되겠다는 꿈을 맞바꾼다.

가족·민족주의 전면화해 매력 잃어

‘조선적색단’이라는 단체의 비밀 조직원에 의해 친일파가 암살되는 사건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 발생하지만, 민족적 책무감은 박경원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젊은이 개인의 자아실현 욕망을 대체하지 못한다. 영화는 이 ‘선택’에 대해 비난도 찬사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닫고 그저 비극을 향해 돌진해간다. 이 영리한 ‘중립적 침묵’은 오히려 두 남녀 캐릭터를 식민지 청년의 ‘전형’으로부터 구해내고 젊은이 본연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성취하게 한다.

 
영화 속에서 박경원은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꿈을 이룬 인물로 죽는다. 이는 <청연>이 <태풍>과 어긋나는 지점이다. <태풍>에서 씬(장동건 분)과 강세종(이정재 분)은 한반도의 청년으로 태어나 최후까지 한반도 청년으로 남는다. 씬이 남긴 최후의 한마디인 “우리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도, 강세종의 씬을 향한 맹목적인 선의와 호의(많은 관객들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불평하는 두 지점이다)도 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반도의 청년이라는 점을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이해될 만한 것이다.

<친구>나 <똥개>에서 탁월하게 30~40대 남성의 심리를 파고들었던 곽경택 감독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담론을 전면화하면서 매력을 잃어버린다. 두 배우가 호연을 보여주었음에도 씬은 가족주의라는, 강세종은 애국주의라는 살아 움직이는 개념 혹은 이데올로기에 갇혀버린 ‘추상적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지난 한 해 흥행한 영화, 대중적으로 실패한 영화를 돌아보면 두 가지 오해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웰컴 투 동막골>이 매우 ‘이념적’(특히 반미적인)인 영화라는 오해이고, 또 하나는 ‘민족주의(로 해석한 남북분단)가 흥행 코드’라는 믿음이다. <웰컴 투 동막골>은 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탈이념적 공간과 순수한 인간을 그려낸 휴머니즘에 바탕한 작품이다. 이는 ‘좌파적’이거나 ‘진보적’이기보다는 공상적 휴머니즘 혹은 이상적 낭만주의에 가깝다. 이 휴머니즘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아퇴행적’(유아야말로 어떤 권력이나 이념, 지배로부터 자유롭다)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DMZ라는 가장 정치적인 공간 위에서 동화(공기놀이, 닭싸움, 초코파이 나눠먹기)의 세계를 창조한다. 반면 2005년 (강대국 지향의) 공격적인 민족주의를 보여줬던 <천군>이나 마지막까지 주인공에게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사슬을 풀어주지 않았던 <역도산>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웰컴 투 동막골>이 보여준, 인간으로부터 정치와 이념의 족쇄를 벗기려는 상업적 휴머니즘은 역설적으로 대중 상업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최대치가 아닐까. 때로 감독 혹은 작가가 가진 세계관과 이데올로기가 날것으로 영화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민족주의나 애국주의가 적어도 영화에서만큼은 ‘보장된 흥행 코드’가 아니라는 점에서 할리우드보다는 아직 한국영화 관객이 더 건강하다는 데 안심도 했던 한 해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