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범은 똑똑했고 교도관은 멍청했다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5.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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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엽기 강간범의 ‘느긋한 탈출’로 시끌 간수들, 면회객이 신고할 때까지 전혀 몰라

 
미국 남부 플로리다 주의 주도이자 휴양지로 유명한 마이애미 시가 요즘 희대의 강간범 탈옥 사건으로 시끌벅적하다. 천만다행으로 범인은 다시 붙잡혔다. 그러나 후유증이 크다. 문제의 범인은 올해 34세의 남미 온두라스 출신 이민자인 레이날도 라팔로.
 
그는 지난 2002년 9월 당시 21세의 여성을 시작으로 이듬해 9월 검거될 때까지 1년여에 걸쳐 열한 살짜리 여아에서 79세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7명의 부녀자를 닥치는 대로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DNA 분석, 나아가 그의 자백 등 모든 물증을 분석한 결과 그가 범인일 가능성은 100% 확실했으며,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될 경우 종신형을 받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런 그가 2월에 열릴 정식 재판을 코 앞에 둔 지난해 12월20일 저녁, 수감되어 있던 교도소를 감쪽같이 탈출했다. 그의 탈옥은 영화 <쇼생크 탈출>을 떠올릴 정도로 극적이었다. 감옥 내부에서 외부로 통하는 통풍구를 통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사 결과 라팔로는 외부 협조자의 도움을 받아 수감 후 3개월간 치밀한 탈주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와 함께 탈주를 시도했던 또 다른 죄수는 탈주 중 발목 골절상을 당해 검거되었다.
 
이번 일로 미국 교정 당국은 해당 교도소의 간수 2명을 직위 해제하는 등 징계 조처를 내리는 한편, 교도소 내 허술한 보안 체계를 전면 보강하고 나섰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땜질 처방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조사 결과 라팔로가 수감되어 있던 교도소에는 흉악범의 경우 탈주가 불가능할 정도의 철통같은 보안 시설을 갖춘 죄수동이 따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팔로가 이곳에 수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사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교도소 내 허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라팔로가 탈주했다는 사실을 맨 처음 파악한 사람은 그를 감시했어야 할 간수가 아니라 누군가를 면회하기 위해 온 외부 방문객이었다. 

 
우선 라팔로의 12월20일 탈주 당일 행적부터 살펴보자. 그날 저녁 라팔로는 2월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변호인단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한 심리 전문의의 방문을 받았다. 이어 그날 밤 9시30분께 교도소를 찾았던 한 면회객이 간수들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보고했다. 누군가 침대 시트를 찢어 만든 줄을 타고 죄수동 외벽으로 기어 내려가더라는 것이었다. 이 목격자에 따르면 그 행위는 교도소 순찰차가 문제의 죄수동을 지나가자마자 이루어졌다.

당시 라팔로는 강간범만 따로 수용하는 죄수동에 갇혀 있었는데, 그날 밤의 경우 한 명의 간수가 51명의 죄수를 감시해야 했기 때문에 감시가 그만큼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라팔로의 탈주 사실이 보고되자마자 교도소 당국에 비상이 걸리고 즉시 모든 수감동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그러나 라팔로는 이미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진 뒤였다.

미국 마이애미 경찰서의 수사 결과 라팔로는 자신이 수감되어 있던 감옥의 6층 천정에 설치된 통풍구를 뚫고 지붕 위로 빠져나간 뒤 거기서 침대 시트를 찢어서 만든 밧줄을 이용해 탈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통풍구를 막고 있던 자물쇠가 예리하게 쇠톱으로 잘려나갔다는 점이다. 경찰은 교도소 반입이 금지된 쇠톱이 탈주에 사용된 점에 비추어 외부자의 협조 없이 라팔로가 혼자서 이런 범행을 저지를 수는 없었을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실제로 그와 한 방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는 경찰에 라팔로가 쇠톱을 몰래 숨겨놓고 있었다고 털어놓은 것으로 밝혀졌다. 한마디로 라팔로가 갇혀 있던 교도소의 보안 체계가 엉망이었던 셈이다.

흉악범을 경범죄자 감방에 수감했으니…

그의 탈출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역 언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현지 최대 신문인 마이애미 해럴드에 따르면 이 교도소는 각 수감동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감시탑이나 쇠창살로 만든 감방도 없다. 때문에 교도소라기보다는 일종의 대학 기숙사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는 것이 면회객들의 얘기다.

게다가 최고의 흉악범을 가둔 감방 건물이 아닌 죄수동에 수감된 죄수들은 자유 시간에 서로 왕래하거나 만날 수 있어 금지된 품목들을 얼마든지 교환할 수 있었다.
라팔로가 범행에 사용한 침대 시트만 해도 그렇다. 이 교도소는 죄수 1인당 2장의 시트를 제공한다. 교도소측은 시트를 죄수들에게 나누어주고 분배와 분실 여부를 모두 기록하기 때문에 라팔로가 시트 여러 장을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직 간수들에 따르면 이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린다. 이를테면 죄수들이 재판을 받으러 간 사이 간수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지 않으면, 누군가 시트를 훔쳐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식으로 쉽다는 것이다.

또 이 교도소에는 평소 내부 감시용 카메라가 2백47대 있고 지붕 위에도 감시 카메라가 23대나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고 당일 내부 감시용 카메라 6대, 그리고 지붕 카메라 2대가 각각 작동 불능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라팔로는 이처럼 느슨한 보안 체계 속에서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이같이 심각한 보안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당하자 이 교도소의 찰스 맥레이 소장은 뒤늦게 이를  시인하고 보완책 마련에 나섰다. 한 예로 이번에 라팔로가 이용한 통풍기의 경우 지금까지는 입구를 자물쇠로 채웠지만 앞으로는 아예 납땜으로 봉쇄할 방침이다. 이 교도소에는 현재 1백92개의 통풍구가 지붕 위로 연결되어 있다.

또 라팔로의 탈출을 계기로 작동 불능 상태임이 드러난 일부 감시 카메라도 즉시 교체하기로 했다. 나아가 밤에도 교도소 안팎을 대낮처럼 감시할 수 있도록 강력한 감시 조명을 설치할 계획이다. 아울러 앞으로 한 달 내에 제2의 라팔로 사건을 막기 위한 청사진을 마련해 발표할 방침이다.

 문제의 교도소는 지난 1989년에 지어져 미국 국내에서는 이른바 ‘3세대 교도소’에 속한다. 즉 이 교도소는 당초 1년 이하의 징역이 확실한 경범죄자들을 재판을 받기 전까지 수용하는 일종의 대기 장소로 만들었다. 이런 취지를 살려 감방과 감방을 쇠창살 대신 벽으로 연결했고, 플라스틱 가구까지 설치했다. 게다가 간수들도 죄수들과 제한적이나마 어울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곳에 갇힌 죄수 중 적지 않은 수가 무죄 판결을 받고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교도소 시설이나 분위기도 그에 걸맞게 맞추었던 것이다.

 다만 여러 죄수동 가운데 흉악범을 수감한 딱 한 곳만큼은 감방 문은 물론이고 의자 등 모든 집기를 금속으로 만들었다. 마이애미 해럴드는 사설을 통해 ‘라팔로가 수감되었어야 할 곳이 바로 이런 시설인데, 그가 그곳에 없었다는 것은 최대의 의문’이라고 질타했다.

이같은 비판에 대해 교도소 관리들은 심각한 인력 부족 문제가 주된 이유라며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라팔로와 같은 흉악범의 경우 충분히 탈주를 방지할 수 있는 시설을 버젓이 갖추어 놓고도 죄수를 놓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번 사태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 현지의 지배적인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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