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수사권 위해 버티고 또 버티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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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영 전 경찰청장 ‘뒤늦은 사퇴’ 전말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허준영 경찰청장의 낙마라는 돌발 변수가 불거졌다. 그의 낙마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수사권 조정과 관련한 정부안이 1월 중 나올 예정이기 때문에 두 기관은 이번 사태가 미칠 파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검찰은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겉으로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다. 경찰도 지금까지의 기조가 있기 때문에 허청장 한 사람이 낙마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공권력 전체의 신뢰 문제와 관련해 볼 때 검찰이 좋아할 일이 결코 아니다”(국가수사개혁단 조은석 검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속내는 달라 보인다. 법조 브로커 윤상림씨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편파 수사를 하고 있다며 비난하는 등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여온 허청장이 낙마하자 검찰은 한결 여유를 찾은 분위기다.

지난해 12월5일 열린우리당 수사권 조정 정책기획단이 검·경을 대등한 수사 주체로 명시한  안을 발표한 직후부터 검찰은 초비상이 걸렸다. 경향 각지에서 뽑은 20여명의 검사들로 ‘국가수사개혁단’을 만들어 외국 사례를 연구하고 경찰에 대응하는 논리를 전파했다. 전국의 검찰 동향을 매일 브리핑했고, 영장 청구 전 검사의 피의자 면담 요청을 거부한 경찰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기도 했다.

검찰은 현재 국무총리가 중심이 되어 만들고 있는 정부안에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경찰의 입장을 반영한 ‘홍미영·이인기 의원 법안’과 검찰의 입장을 반영한 ‘김재원 의원 법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는 만큼 정부안이 사실상 검·경 수사권 조정안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청와대의 지원을 업고 있는 검찰은 이런 상태라면 정부안에서 크게 밀릴 것이 없다고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국가 제도를 여론에 따라 만들 수는 없다. 수사 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는 정부가 다양한 측면을 감안해서 주도할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정부안이 만들어지면 정치권이 이를 뒷받침하는 형태가 될 것으로 본다. 50년간 유지해 온 제도인데 앞으로 최소 50년은 유지될 제도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강조했다. 검찰은 이럴 때일수록 수사권 조정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조용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허준영은 강자에게 제 목소리 낸 유일한 청장

경찰은 의욕이 크게 떨어졌다. 황운하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은 “1·2월이 중요한데 검찰이 쾌재를 부를 것이다. 경찰의 추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라며 고민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농민시위에서 전용철씨가 사망한 뒤 홍덕표씨마저 사망하면 허청장 사퇴론이 확산될 것이라며 검찰이 언론과 청와대를 상대로 사퇴론을 기정사실화하고 퍼뜨린 의혹이 있다”라고 말했다.

황팀장의 말마따나 지금까지 수사권 조정 문제에서 집단적으로 대응해 온 경찰은 당분간 조직적인 대오가 크게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고위 간부들의 인사가 예정되어 있고 청문회를 거쳐 새로운 경찰청장이 취임하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최광식 차장 대행 체제로 운영된다고 해도 과거 허청장이 보여주었던 밀어붙이기는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서울경찰청에서 근무하는 한 경찰관은 “차기 경찰청장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 가운데 허청장 같은 신념과 추진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누가 되든 지금보다 약체가 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검찰의 은밀한 공세가 앞으로 더욱 거세고 집요하게 구심점을 잃은 경찰을 파고들 것도 불 보듯 뻔하다.

 
그동안 수사권 조정 문제에서 검찰이 청와대에 의지했다면 경찰은 국회에 의지했다. 우리당 기획단이 검·경을 대등한 수사 주체로 인정한 조정안을 내놓았을 때 경찰에서 많은 박수가 나왔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이제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 사태를 거치며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경찰의 버티기를 두 눈으로 보았다. 일정하게 견제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면은 향후 경찰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정부안을 주도할 천정배 법무부장관은 “민생범죄에 한해 경찰에 수사권을 부여하면서도 수사의 책임성과 통일성을 고려할 때 검찰의 수사지휘권은 존속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검찰이 ‘지휘권’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천장관이 말한 범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게 정부안이 마련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검찰 주변에서는 “천장관이 우리 편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말도 나온다. 간접적으로 천장관을 압박하는 흐름이자 정치인 출신 장관에 대한 신뢰가 아직 굳건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허준영 낙마’ 이후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와 관련해 부각되는 변수는 올 5월 실시될 지방선거다. 선거 사범 단속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는 경찰의 움직임에 정치인들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허청장의 낙마 이후 큰 충격에 빠져 있는 경찰은 1월 말 정부안이 나올 즈음에 정치권을 상대로 막판 대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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