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의 최종 선택 ‘납북자 처리’
  • 도쿄 · 이하빈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6.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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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문제화 위해 발빠른 움직임…임기 말년 ‘업적 남기기’ 겨냥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정치적 전략일까. 최근 일본이 납북자 문제를 국제 무대로 옮겨가려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고이즈미 정권 말기라는 특수한 시점과도 맞물려 있어 정치적 배경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보수·우경화의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 정치판의 분위기를 볼 때 그 속내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오는 9월 임기가 끝나는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그동안 ‘국제 외교 미숙’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아왔던 터라 대북 외교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들이고 싶어 한다. 핵을 비롯한 대북 외교 현안들이 많지만 일본 국민들의 정서상 가장 민감한 납북자 문제는 퇴임 후까지를 염두에 둔 정치 기반 강화라는 면에서는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두드러지게 납북자 문제를 국제 이슈화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일본 국내외에서 적지 않게 반향을 일으킨 주한 미군 탈영병 찰스 젠킨스의 수기집 출간을 계기로 북한에 의한 제3국인의 납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니시오카 쓰토무 납북일본인구출협의회 부회장이 지난해 12월 북한인권보회에서 밝힌 전세계 11개국의 납북 피해자 상황과 납치에 관여한 것으로 자체 결론을 내린 신광수·박 아무개씨 등 북한 공작원에 대한 인터폴 수사 요청 같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이런 흐름이 쉽게 감지된다.
 
 
2004년 젠킨스의 일본 입국을 계기로 정점으로 치닫던 북한 당국에 의한 납치 건에 대해 들끓던 여론은 그 뒤 조금씩 수그러든 느낌이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동안 납북자 문제를 국제 무대로 끌고 가지 못했다는 반성론도 제기되었다. 이 문제를 일본 국민 몇 명의 가족 문제로 몰아가 국민들의 눈물과 흥분을 자극하는 데 그쳤던 언론에 대한 질책이었다.
 
일본 국민 70% “대북 경제제재 찬성”

납치자 문제의 국제 이슈화 움직임은 이 시점에서 본격화했다. 일본 언론은 지난해 12월 젠킨스의 태국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때의 방문은 일본 납치자 가족회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으며, 역시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태국인 여성의 가족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수캄 판초이라는 이름의 이 태국인은 그 뒤 다시 일본을 방문해 일본측 납치 피해자 가족들을 만났다. 이 역시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일본 납치 피해자 가족 모임의 이름으로 ‘납치 피해 문제는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닌 국제 문제다’라는 주장과 함께,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압력을 높이자는 강경한 목소리가 나왔다.

일본 언론 일각에서는 최근 국제 이슈화의 움직임에 대해 ‘북한의 납치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특수 체제에서 비롯한 관련 사건 등을 심층 보도해 국제적으로 동감을 얻었다면 문제 해결이 보다 쉬웠을 것’이라는 식으로 수그러들던 납치자 이슈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일본 국내에서 납북자 문제로 인해 북한에 대한 감정이 한창 극으로 치달았을 때 일본은 집단 히스테리 증상을 보였다. 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 계열 학교 학생들에 대해 집단 따돌림 같은 물리적 폭력도 있었다.  일본 여론 일각에서는 감정적인 대응의 파고를 힘겹게 넘은 시점에서 일본 국민들의 불만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납북 문제를 국제 이슈화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대응책이라고 받아들이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납북자 가족들은 ‘더 이상의 진상 규명보다는 하루라도 빠른 구출’을 주장하는 쪽으로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끝없는 정치적 줄다리기의 파고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는 절박감이 배어 있었다.
 
납치 문제는 일본 국민의 70%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에 찬성하고 있을 정도로 강경론이 점점 강해지고 있지만 일본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 사안에 다소 냉정하게 움직이는 한국·미국·중국을 배제한 단독 제재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 경제 제재 따위 극단적인 조처를 취할 경우 국교 정상화 협상에 미칠 부작용 등 예견되는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국교 정상화에 중점을 두고 싶지만 이같은 국민 정서상 납북 문제의 ‘선해결’을 외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퇴임 후 정치 입지 강화도 노린 포석

일본 최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일간지 요미우리의 최근 사설은 일본 내 거대 보수층의 납북 문제에 대한 시각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 신문은 “일본은 국가적 범죄에 해당하는 납북자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해결해야 한다. 북한이 국교 정상화 교섭을 통해 과거 청산과 함께 일본에 대한 경제적 협력을 노리고 있지만 일본은 원칙을 절대 고수해야 한다. 국교 정상화를 서둘 이유가 없다”라고 못박고 있다. 북·일간 국교 정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교 자금’이다. 이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납치자 문제를 여전히 중요한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심산을 드러낸 것이다.

국민 정서와 퇴임 후까지 고려한 정치 기반 강화라는 두 가지 면에서 납북 문제 해결을 둘러싼 고이즈미 정권의 딜레마는 피할 수 없다. 납북 문제의 국제 이슈화는 고이즈미 총리 쪽에서 볼 때 나름대로 부담스런 짐을 덜고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해법으로 기대를 걸 만도 하다.

오는 1월 말 3년여 만에 재개되는 북한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 협의에서 과연 납북 문제가 어떤 식으로 새롭게 가닥이 잡힐지, 그리고 임기 내 고이즈미 총리의 세 번째 깜짝 방북이 이루어질지 국내외의 시선이 집중되는 시점이다.

일본은 고이즈미 총리의 ‘정치적 아버지’로 불리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 이후 최고의 보수 물결에 휩싸이고 있다. 지지율이 80%에 육박하고 있고, 심지어 2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굳이 일본이 한국·중국과 잘 지낼 이유가 있겠느냐는 식의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1월4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올 가을 열릴 자민당 총재 선거와 관련해 “톱 리더는 국민적인 지지를 얻는 게 아주 중요하다”라며 사실상 보수 진영의 간판 얼굴인 아베 신조 관방장관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아베 장관은 국제 연대를 통한 납북자 문제의 해결을 전제로 한 국교 정상화 교섭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등으로 고이즈미와 닮은꼴 소신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현재의 일본 정치판 분위기로 볼 때 납북자 문제의 큰 틀은 차기 정권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업적 남기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고이즈미 정권이 어떤 카드를 구사할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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